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기준입니다. 평가 기준의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모, 조직 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는가?’, ‘어떤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는가?’, ‘예수님에 대해 왜곡되거나 거짓된 가르침을 얼마나 단호하게 근절시키는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모하는가?’를 평가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믿음과 인내와 충성을 다한 교회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직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것도 혹독한 책망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로부터 남동쪽으로 6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일곱 도시 중에 가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리쿠스’라는 계곡을 따라 형성된 세 개의 도시와 인접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북쪽에는 ‘히에라볼리’라는 도시가 있고, 남쪽에는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들에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도시는 주전 253년, 셀루쿠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2세가 건립했는데, 그의 아내 이름이 ‘라오디케’라고 합니다. 왕비의 이름을 따라 ‘라오디게아’라고 도시 명을 지었습니다. 여러 무역로와 통신로가 만나는 곳이기에 상업과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주전 133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토양도 비옥하고, 주요 도로가 지나가는 위치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성했습니다. 특히 발달한 산업이 금융업, 직물산업, 의료 산업이었다고 합니다. 그 덕에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자부심도 매우 강했습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함
“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아멘이시요,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들을 알고 있는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바란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니 내가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낼 것이다’”(14~16절).
‘아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증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아멘’과 ‘충성되고 참되다’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곧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 창조의 근원이십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참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며 책망하십니다. ‘미지근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찬 것을 불신의 상태로 표현하고, 뜨거운 것을 믿음이 좋은 상태로 해석하면서 ‘미지근하게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고 합니다.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둘째, ‘차다’와 ‘뜨겁다’ 모두를 열정으로 보고 ‘열정이 식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차다’, ‘뜨겁다’는 단어가 사람의 기질, 성격, 열심의 상태를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증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아멘’과 ‘충성되고 참되다’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곧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 창조의 근원이십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참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며 책망하십니다. ‘미지근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찬 것을 불신의 상태로 표현하고, 뜨거운 것을 믿음이 좋은 상태로 해석하면서 ‘미지근하게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고 합니다.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둘째, ‘차다’와 ‘뜨겁다’ 모두를 열정으로 보고 ‘열정이 식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차다’, ‘뜨겁다’는 단어가 사람의 기질, 성격, 열심의 상태를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올바른 것은 당시 라오디게아 도시의 특징과 연결해서 1차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말씀에 명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매우 친숙한 사이일 때 명사를 쓰지 않습니다. 명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았고, 나머지 여섯 교회도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단 하나 결핍된 문제가 ‘물’이었습니다. 자체적으로 물 수급이 안 됐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공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계곡에 있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라는 도시가 중요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온천수가 나오는 지역이었습니다. 반대로 골로새는 아주 맑고 차가운 생수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 모두 몸에 효과가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는 소독과 회복 차원이 있고, 온천수에는 미네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맑고 차가운 물은 몸을 자극하고 각성시키고 근육을 보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물이 라오디게아까지 수로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로가 오늘날처럼 관리가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염됐습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이고, 물이 오염 됐습니다.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면 오염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 물이 이동하면서 미지근한 상태가 되고 오염됐습니다. 여기서 미지근한 물은 효과 없는 믿음, 무기력한 믿음, 병든 믿음을 의미합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 상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나 너는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경고한다. 네가 풍족하게 되려면 내게서 불로 정련한 금을 사거라.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흰옷을 사서 입어라. 네가 보고 싶으면 안약을 사서 네 눈에 발라라”(17~18절).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 지를 지적하시고 경고하십니다. 라오디게아가 외적으로 잘 갖췄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영적으로는 결핍되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자기 인식과 예수님의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은 가난하다. 불쌍하다. 그러니 내게서 금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금은 불로 정련한 믿음입니다. 그 금이 없는 한 이 땅의 모든 금을 가져도 결코 부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옷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수치스럽게 벌거벗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안약이 발달해서 눈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고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은 실제로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는 약을 발라서 다시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풍부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모두 결핍 되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번영과 부, 그 자체를 꾸짖는 게 아닙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함이란 그릇된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서 ‘열심’이 최우선이 아닙니다. 올바른 자기 발견이 최우선입니다, 자기 상태를 알고, 자기 문제를 알고, 그 다음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 없는 열심 때문에 우리 신앙이 속는 것입니다. ‘미지근함’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1차적으로 ‘열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 자만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자만은 영적 수준이 깊이 올라간 사람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안 믿는 게 낫지’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믿는 게 낫습니다. 불신보다 훨씬 낫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믿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의존적인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 지를 지적하시고 경고하십니다. 라오디게아가 외적으로 잘 갖췄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영적으로는 결핍되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자기 인식과 예수님의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은 가난하다. 불쌍하다. 그러니 내게서 금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금은 불로 정련한 믿음입니다. 그 금이 없는 한 이 땅의 모든 금을 가져도 결코 부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옷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수치스럽게 벌거벗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안약이 발달해서 눈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고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은 실제로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는 약을 발라서 다시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풍부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모두 결핍 되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번영과 부, 그 자체를 꾸짖는 게 아닙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함이란 그릇된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서 ‘열심’이 최우선이 아닙니다. 올바른 자기 발견이 최우선입니다, 자기 상태를 알고, 자기 문제를 알고, 그 다음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 없는 열심 때문에 우리 신앙이 속는 것입니다. ‘미지근함’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1차적으로 ‘열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 자만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자만은 영적 수준이 깊이 올라간 사람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안 믿는 게 낫지’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믿는 게 낫습니다. 불신보다 훨씬 낫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믿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의존적인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책망과 회복, 그리고 두 가지 약속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격려하시며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20절).
이 말씀은 불신자 보다 이미 믿는 성도들,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격적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문을 열라고 비바람이 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안에서 문을 열리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그분을 자기 마음 밖에 세워 두고 문을 두드려도 모시지 않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지근함은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진 상태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주인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강제로 굴복시키고 군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은 문밖에 계신 예수님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함께 식사하십니다.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상태,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는 영적 거지와 같은 이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 왕자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부요케 하시고, 벌거벗은 이들을 입히시고, 보지 못한 이들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누리는 것이 미지근한 상태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삶에서 믿음이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 마음에 그분을 온전히 모셔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지근한 상태, 오염된 믿음, 효과 없는 믿음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과 함께 통치함을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은 것같이 내가 내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할 것이다”(21절).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다시 모셔 들이고 교제할 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통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우리를 함께 앉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통치의 권세를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20절).
이 말씀은 불신자 보다 이미 믿는 성도들,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격적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문을 열라고 비바람이 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안에서 문을 열리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그분을 자기 마음 밖에 세워 두고 문을 두드려도 모시지 않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지근함은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진 상태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주인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강제로 굴복시키고 군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은 문밖에 계신 예수님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함께 식사하십니다.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상태,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는 영적 거지와 같은 이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 왕자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부요케 하시고, 벌거벗은 이들을 입히시고, 보지 못한 이들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누리는 것이 미지근한 상태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삶에서 믿음이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 마음에 그분을 온전히 모셔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지근한 상태, 오염된 믿음, 효과 없는 믿음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과 함께 통치함을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은 것같이 내가 내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할 것이다”(21절).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다시 모셔 들이고 교제할 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통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우리를 함께 앉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통치의 권세를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미지근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두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님, 보좌의 왕, 통치자로 좌정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 모시고, 실제로는 문 밖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책망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7)-빌라델비아 교회 (계 3:7~13) / 이재훈 목사 (1) | 2025.02.22 |
---|---|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6) -사데 교회 (계3:1~6) / 이재훈 목사 (0) | 2025.02.15 |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5) 두아디라교회 (계 2:18~29) / 이재훈 목사 (0) | 2025.02.09 |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2)(에베소교회, 계 2:1~7) / 이재훈 목사 (0) | 2025.02.01 |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 (계 14:1~5) /이재훈 목사 (0) | 2025.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