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십계명 ‘너머’(막 10:17-22)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10. 17. 06:35

 창조절 7, 2024년 10월 13

 

 

영생에 관한 질문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질문했습니다. 무례해 보입니다. 실제로는 인사를 했으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그런 내용은 필요 없으니까 생략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로 바리새인들처럼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처럼 정말 진리를 알고 싶어서 질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질문한 영생’(eternal life)은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보도하는 요 3장은 이 영생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5-16) 유대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8)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6)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뭔가 뜬구름을 잡는 거 같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죽지 않느냐고, 정말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만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묻고, 하나님 안에서 죽음이 극복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이런 관점은 현재의 삶을 보잘것없다고 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고 절대적인 사건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이를 한스 큉의 표현으로 바꾸면 삶에 대한 신뢰’(Vertrauen zum Leben)입니다. 삶을 신뢰하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볼 때 그리스도교의 영생 교리를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전반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살아봐야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니까 현재의 삶을 먹고 마시면서 즐기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허무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태도로 삶을 즐긴다고 해서 정말 즐거울까요? 행복할까요?

 

오늘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누구 못지않게 삶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했겠지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던 사람이 멘토를 찾아간다는 심정으로 예수를 찾아온 겁니다. 그는 두 단계로 대답을 듣습니다. 첫 단계는 십계명 준수입니다. 본문 막 10:19절에 여섯 항목이 언급되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본래 십계명은 열 개 항목입니다. 앞에 나오는 네 항목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일들이고, 뒤에 나오는 여섯 항목은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일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뒤 항목만 언급했습니다. 이 항목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확실하게 이 계명을 지켰는지, 이 계명을 형식이 아니라 그 본질의 차원에서 지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모범적으로 살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공교육의 목표도 기본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겁니다. 문제는 도덕적이면서 모범적인 삶만으로 사람의 영혼이 풍성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혼의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살았다면 굳이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가족과 친구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들입니다. 서울의 명문대학교를 나와서 정부나 대기업체에 고위급으로 올라간 사람이나 의사나 판사나 대학교수, 또는 잘 나가는 유튜버일지 모릅니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대형 교회 목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스펙과 생활 수준만 보고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말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삶도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도 외로워하고, 허무에 떨어지고, 자기 실존을 불안해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 앞에서 스스로 좌절합니다. 더 근본에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세끼 밥을 먹고 배설하고 숨을 쉽니다. 이런 것에 비해서 사람의 생활 수준은 주변적이고 종속적인 겁니다. 생활 수준이 높은 것만으로는 영혼의 만족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오죽했으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는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이왕 찾으려면 제대로 찾아야겠지요. 사이비 교주를 찾아가듯이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은 잠시 솔깃할 수는 있어도 참된 만족을 주는 영생과는 거리가 멉니다.

 

소유 포기

 

21절에 따르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라고 말하는 이 사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고 말씀하셨다.’라고 합니다.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정도 수준의 사람도 흔하지 않으니까요. 우리 식으로 바꿔서 교회 생활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정도로 충성 봉사한 그리스도인임이 분명하니까 칭찬해줘야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됐으니 돌아가서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성실하게 살면 충분하다.’라고 조언할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뜻밖으로 그에게 당신의 재산을 포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그 사람이 예수께 들은 둘째 단계의 대답입니다. 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성실하고 착한, 그래서 예수님께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에게는 곤혹스러운 요구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 와서 뭔가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으나 오히려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오지 않음만도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모세오경을 달달 외우라거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라고 했으면, 예수 공동체를 위해서 기부금을 내라고 하면 기쁨으로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일종의 아킬레스건인 재물 문제를 언급하셨으니 피해 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위선이 까발려진 셈입니다.

 

이 사람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2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 말씀이 실제로 옳을까요? 이 말씀이 옳다면 지금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멀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재산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부자이면서도 신앙이 좋은 사람도 물론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본다면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고( 6:24)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이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거나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라고 말하겠지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불법만 아니라면, 더 정확하게는 불법이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부자가 되는 게 선이고 정의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시대정신 가운데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걸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섬긴다면 그 이외의 것은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일상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은 한 가지입니다. 숨을 쉬면서 동시에 밥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기도가 열리면 식도가 닫혀야 하고, 식도가 열리면 기도가 닫혀야 합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도 오직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줬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무소유로, 아니면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만으로 사는 게 최선일까요? 그렇게 산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스콧 니어링(1883-1983)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그는 미국의 명문가 가정에서 태어나서 경제학 교수가 되었으나 반자본주의와 반전 평화 사상을 설파하다가 간첩 혐의로 연방 법원의 재판도 받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도시를 떠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 자연인처럼 심플라이프를 실천했습니다. 100세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마쳤습니다. 지금도 심플라이프나 미니멀리즘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도원 생활은 무소유와 심플라이프를 전제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발적 가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한국 신학자도 있습니다. 이런 삶은 일부에게만 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윤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십여 년 전 전부터 청부론을 설파한 한국의 대중설교자가 있습니다. 깨끗한 방식으로 부자가 된 다음에 그 돈을 의미 있게 사용하자는 논리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런 논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맞는 윤리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부자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형용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돈을 깨끗하게 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이 허용되는지를 계량적인 방식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각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이런 문제로 힘들어한 것 같습니다.  30: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어지는 9절에서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지 모르며, 가난하면 도둑질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물질에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받기에 물질 문제에서도 자기 성찰을 죽을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 너머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 사람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처음에는 실망해서 떠났으나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 말씀에 순종했을지도 모르고, 아예 예수님과는 담을 쌓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사람은 상당히 모범적이고 경건한 사람입니다. 당시의 기준에 따라서 나름 반듯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고, 영생에 관심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방식으로 그럴듯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런 삶이 무너집니다. 예수께서는 23절에 이어서 24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즉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의 세계는 완전히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다 팔아버리라고 아주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명령을 내리신 겁니다. 이 사람을 아끼셨기에 이런 명령을 내리셨지, 아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지난 목요일 밤 속보로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소설가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깜짝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저는 수년 전 그가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그의 소설 <채식주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은 흔한 표현으로는 가문의 영광이면서, 국가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사 중의 경사입니다. 한강 소설가 본인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기쁘게 여기겠으나 그게 자기 인생에서 결정적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큰 상으로 자기의 문학적 역량이 보장되는 게 아니며, 문학 행위를 상으로 평가한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고,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번에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지 않겠다는 소식이 그의 부친인 한승원 소설가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죽어 나가는 마당에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오직 한민족의 슬픈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는가에만 모였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제자들은 단순히 십계명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계명 너머를 지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삶에 방해되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다그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지나치다고, 현실성이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이 재산이 많기에 슬퍼하면서 예수를 떠났듯이 예수의 말씀에 거리를 둡니다. 다음과 같은 엄중한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부둥켜안고 있는 재산과 인간관계와 문학적 업적과 정치적 업적은 언젠가 우리 곁을 홀연히, 완벽하게 떠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세계에, 오늘 본문에 나온 용어로는 영생에 집중하는 것이 실제로 현명하면서도 현실적인 삶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지만, 문제는 십계명 너머가 가리키는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삶에 관한 생각 자체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게 영원한 생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삶에 관한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삶은 우리가 설계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깊이와 삶의 신비를 가리키는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즉 십계명 너머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생각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