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8주, 2024년 10월 20일
욥 이야기
혹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 용어를 들어보셨는지요. 신정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인간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왔습니다. 의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지금도 선천적으로 큰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고, 길을 가다가 ‘묻지 마’ 폭행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로 중도 장애인이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군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희생시킵니다. 참척의 고통도 일상적입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하며 전능하신 존재일까요?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작품 배경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놓여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욥기가 대표적입니다.
욥 1:1절에 따르면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아들 일곱에 딸은 셋이었고, 재산도 갑부 소리를 들을 만했습니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였습니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서 철저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녀와 재산을 몽땅 잃었습니다. 독한 피부병에 걸려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의 아내가 욥을 비난하는 이유는 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아내의 비난과 욥의 대답은 이후로 친구들과 욥의 논쟁에서 반복됩니다. 친구들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32-37장에는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욥을 공격하는 이들의 논리를 압축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욥이 이런 대재난에 떨어진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회개해라. 둘째, 욥의 대재난은 영적인 훈련이니까 참고 견뎌라. 그런 시험을 통과하면 더 높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욥은 어머니 태 속에서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고 토로할 정도로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친구들의 조언, 또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떳떳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당시 사람들이 옆에서 이런 논쟁을 들었으면 욥보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지지했을 겁니다. 욥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비롯한 친구들의 조롱까지 받았으니 그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갑니다.
욥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입니다.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해피엔딩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에 나온 욥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욥 42:5-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오랜 친구들의 간곡한 조언이나 비판에도 자기 생각을 전혀 굽히지 않았던 욥이 갑자기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합니다.’ 회개하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주님을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야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욥의 세계관이 들음의 차원에서 봄의 차원으로 바뀐 겁니다. 본래 성경은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 하지,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봄의 종교가 아니라 들음의 종교이고, 고대 근동의 종교는 봄의 종교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시각적이고 자극적인 감각을 가리키기보다는 깨달음의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견성(見性)의 차원입니다. 돈오(頓悟)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근원과 시원에 관한 질문
욥이 거의 천지개벽이라 할 정도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욥38-41장에 나옵니다. 서문에 해당하는 대목이 오늘 설교 본문인 38:1-7절입니다. 온갖 조롱과 고독과 절망 가운데 놓인 욥을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찾아오십니다. 당신이 묻는 것에 대답해보라고 욥을 다그칩니다. 여호와의 다그침이 41장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깊이에 대한 질문입니다. 질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4절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5절입니다.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다음은 6절입니다.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이런 표현에는 2천 5백 년 전 당시의 우주관이 놓여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우주는 삼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지하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물을 분리해서 가운데에 공간과 땅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하늘 위에는 여전히 물이 있습니다. 그 물이 쏟아지는 현상이 비입니다. 우리와 비교하면 그들의 우주물리학은 유치합니다. 그러나 근원에서는 그들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지 않습니다. 근원은 여전히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비밀을 느끼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세상의 궁극적인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비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일상에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책입니다. 컵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책의 질료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인도네시아나 브라질 같은 원시림에서 자랐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려면 탄소동화작용이 필요합니다. 나무에는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태양에서 9분 동안 달려온 빛이 들어 있습니다. 책은 빛이라고 해도 됩니다. 태양은 138억 년 이전에 벌어진 빅뱅의 산물입니다. 책의 시원은 빅뱅과 연결됩니다. 욥기 식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책과 빅뱅 사이의 그 긴 과정을 다 알 수 있는가? 정확하게 설명해봐라.’ 이런 물리적 과정을 아는 것만으로 지금 여기 있는 책을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빌려서, 책이라는 형상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구체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쓴 사람이 있고, 책을 편집한 사람도 있고, 인쇄하여 판매한 사람도 있습니다. 소소하게 보이는 책 한 권도 우리가 닿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아득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고, 무감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현장과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 사건이 벌어지게 된 사연을 일일이 들여다본다면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겁니다. 50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봅시다. 저는 신학생이었고, 여러분은 각자 다른 처지에서 살았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당시에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했다가 다시 찾은 분도 있고, 다른 교회에서 실망해서 이 교회를 찾은 분도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살다가 대구로 거주지를 옮기는 바람에, 또는 저의 책을 보거나 지인의 소개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우연한 일들이 겹쳐서 우리가 지금 복된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같은 예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신앙생활을 함께 꾸려가는 일은 비밀 가득한 사건입니다.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비밀을 설명하려고 일상적인 두 가지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어디 두 가지뿐이겠습니까. 모든 사물, 모든 현상, 모든 사건은 다 시원적이고 아득하고, 그래서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네가 아느냐?”라는 질문을 연달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세상의 궁극적인 비밀을, 그 은폐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차원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습니다. 욥은 42: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원을 모르면서 시시비비 아는 체한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경험의 핵심입니다. 자기는 끊임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는 아예 없다고 여깁니다. 이게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거꾸로 갈 때가 많습니다. 아는 체를 너무 많이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의 제한적인 지식에 기대서 여기저기,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잔소리하기에 바쁩니다. 속된 표현으로 교회가 ‘꼰대질’을 하는 겁니다.
며칠 전에 저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의 영상을 보고 한국교회가 지금 대형 집회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와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등이 비슷한 대열에 서서 동참 설득 영상을 올렸습니다. 모임의 정식 명칭은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인 10월 27일 오후 2-5시에 광화문-시청대로 일대에서 모인다고 합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차별금지법 반대’입니다. 그중에서도 동성애자 문제가 핵심입니다. 동성애 부부의 합법화로 가정이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그들의 간곡한 호소가 저에게는 블랙코미디처럼 들렸습니다. 진작에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소위 대다수 선진국인 유럽과 북미보다 유독 동성애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턱없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들은 외면하고 있더군요. 다른 건 접어두고, 신학적인 문제를 교회가 왜 대중집회로 해결하려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대법원이 ‘사실혼 동성 동반자에게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이 있다.’라고 지난 7월 18일에 판결했다는 사실로 한국교회가 쓸데없는 위기감을 느낀 듯합니다. 마치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서 당시 그리스도교가 허둥대던 형국과 비슷합니다. 신앙 양심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면 목숨을 걸고 40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든지, 지역별로 이 분야에서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심포지엄을 열어서 여론에 호소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2백만 명의 기독교인을 광장에 불러모아서 기독교의 세를 과시함으로써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동성애 문제에 얽힌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아득한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들의 생뚱맞은 분노가 성경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부정한 것이 아닐는지요. 좋게 봐도 자신들의 알량한 지혜로 욥을 비판한 욥의 친구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욥의 회개는 지혜롭다고 자처하던 친구들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말할 정도로 세상의 비밀을 엿본 데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세상의 가장 궁극적인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골 1:27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비밀인 이유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그저 세계 성인의 한 분, 종교 창시자, 선지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입니다. 고후 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세상의 비밀이 밝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설명이 그리스도교 교리에 불과하지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할 겁니다. 저는 그들을 설득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내용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욥이 우주와 세상의 궁극적인 깊이를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자연주의자들과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최선의 삶입니다. 자연과 역사의 심연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와 자연과 역사의 비밀과 그 깊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창조하고 이끌어가시며 완성하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자체를 찬양하지 않고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깁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냐,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저의 삶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설계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멋지게 설계해도, 솔로몬의 영광도 들의 백합화에 미치지 못하듯이, 그것은 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아무리 불행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몹시 힘들기는 하겠으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늘 저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의 무릎 관절이 망가져서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아도, 욥과 같은 처지에 떨어져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면 더 생명 충만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눈으로 본다는 욥의 고백이 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런 정도의 내공으로 지금 살아가는지는, 욥의 운명을 당해보지 않아서 큰소리칠 수는 없으나,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도 없습니다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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