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10주, 2024년 11월 3일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국어 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프랑스 어느 마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잔잔한 이야기입니다. 전쟁에서 진 프랑스는 앞으로 프랑스어로 수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로 진행된 그 날의 마지막 수업이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명기는 모세가 행한 마지막 수업과 비슷합니다. 모세는 출애굽과 광야 40년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가르침을 남기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인물인 모세가 종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그의 가르침만은 살아남았습니다. 신명기의 핵심을 뽑는다면 오늘 설교 본문인 신 6:1-9절입니다. 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이는 거꾸로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이를 4절 이하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강조하는 문장이 손으로 만져지는 듯하고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 히브리어 ‘쉐마’(들으라.)로 시작하는 단락이라서 보통 ‘쉐마’라고 부릅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아침저녁으로 이 구절을 우리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암송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쉐마 이스라엘 야웨 엘로헤누(our God) 야웨 에하드(one)’ 이를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임팩트가 강하게 표현된 4절은 유일신 신앙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유일신 신앙은 처음부터 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 투쟁의 역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신앙입니다. 당시 대다수 종교는 다신론이었습니다. 다신론이 세상을 설명하는 데에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선한 신도 있고 악한 신도 있어야만 세상의 선과 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에서 우리는 다양한 신들을 봅니다. 바벨론 신화와 이집트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신론 문명권에서는 제국의 왕들도 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국이 유일신 신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이유는 그들의 왕이 신으로 격상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면 인간은 그 누구도 신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되니까요.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자기들이 믿는 여러 신 중의 하나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지막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나안은 남으로는 이집트가 있고 북으로는 메소포타미아가 있었기에 고급스러운 문명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다신론 신앙이 주류였습니다. 가나안은 특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강했습니다. 그런 지역에 들어가서 하나님 여호와만을 믿는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집트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고 엑소더스를 감행한 이들이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건 또 하나의 모험이었으나 그래도 이집트보다는 가나안이 나았기에 모진 어려움을 감내하고 광야를 40년간 거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세의 걱정은 한둘이 아닙니다. 부모 곁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던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 부모들이 느끼는 심정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이 서울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자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큽니다. 모세는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전심전력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모세는 절규하듯이 외쳤습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만이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방법론까지 6절 이하에서 제시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고(6절), 둘째는 그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이고(7절), 셋째는 말씀을 손목에 달고 미간에 붙이며 문설주와 문에 기록하는 것입니다(8-9절).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셋째 항목이 재미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말씀을 쓴 천이나 나무막대를 몸에 달고 다닙니다. 집 건물에도 성구를 적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같은 한자를 써서 대문에 붙이곤 했습니다. 지금도 옛날 한옥에서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문을 드나들 때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영혼에 글씨의 내용이 새겨지겠지요.
모세가 이렇게 구구절절 방법론까지 제시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미있게 노는 일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됩니다. 돈벌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돈벌이나 놀이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에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들음’의 문제는 하나님 말씀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본에 대한 귀 기울임에 해당합니다. 이를 저는 오늘 설교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전심전력 귀 기울임’이라고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잘 들리나 중요한 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대도시에 사는 분들은 도시의 소음으로 가을벌레 소리를 듣지 못할 겁니다. 빗소리와 호미질 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이런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평화롭게 만듭니다.
현대인은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경청(傾聽) 능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합니다. 말하기도 물론 필요합니다. 제대로 말하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정치권을 보십시오. 말은 많으나 건질 말은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더 인간답게 만들지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는 데만 무게를 두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더 어려워져도 자신이 지도자가 되는 길이 있다면 그걸 선택할 정치인들이 차고 넘칠 겁니다. 권력 욕망만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대한민국 정치권을 향해서 귀 기울임의 정치를 요구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교 목사로서 사실은 정치권을 향해서 뭐라 할 처지도 아닙니다. 교회도 귀 기울임은 없고 일방적인 주장만 난무할 실정이니까요. 일주일 전인 10월27일 오후에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28일 자로 공식 블로그에 인사말이 올라왔습니다. 그 인사말 마지막 단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번 연합예배의 가장 강력한 중심에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회개와 성찰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빛과 소금으로 세상의 희망이 되는 교회로 다시 중심을 잡을 것입니다. 더이상 대한민국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거나 동성간의 결혼이 합법화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를 뒤집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회가 중심을 잡겠습니다.”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핵심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회개한다는 것인지가 저에게는 애매하게 들렸습니다. 성 소수자의 외침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매도하는 대형 집회를 열면서 회개했다고 말하다니, 중세기 교회가 마녀를 사냥하던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당시 교회는 마녀로 지목된 이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주변에서 퍼뜨리는 괴담 수준의 이야기를 근거로 주로 부자 미망인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번 집회를 주도하던 이들의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비판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권이나 교회는 왜 상대방의 말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려고만 할까요? 민족성 자체가 이런 건지, 가부장적인 가정 풍토가 이유인지, 아니면 공교육의 잘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인 로마가톨릭교회는 우리처럼 거의 광기에 가까운 추태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은 분은 열린 복음주의자라 할 팀 켈러 목사(1950-2023)의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십시오.
한국교회가 성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근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맥이 닿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교회에서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강한 바람, 지진, 불 현상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일단 세미한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수십만 명이 모인 대형 집회 자리가 아니라 도서관이나 개인 서재나 작은 교회당이나 공원이나 숲으로 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대형 집회를 통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게 아닙니다. 그는 개인의 영적 깊이로 침잠하는 수도승이었고,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조용하게 기도하고 공부하던 사람이었기에 루터는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심지어 신천지 같은 이단에서도 그런 말을 나름 그럴듯하게 하니까 분별할 줄 아는 은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의 귀가 밝아져야겠지요. 귀가 어두우면 소리를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귀가 밝은지 어두운지를 아는 거 자체도 사실은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자기의 귀가 밝다고 자처하던 종교 전문가들이 많았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켜서 격언을 인용해서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마 15:14)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대형교회 목사나 신학대학 교수라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맹인이라는 말씀은 정말 파격적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게 된 계기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밥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트집을 잡은 사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율법으로만 받아들였지 그 근본 의미를 모르거나 왜곡했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확하게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 또는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일은 오늘도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서 ‘죄’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1027’ 대형 집회에서도 반복해서 동성애는 죄라는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부도덕한 행위와 비윤리적인 행위가 죄라는 생각이 아주 분명하게 들어있습니다. 회개하라거나,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을 늘 그런 부도덕한 행위와만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근본을 정확하게 짚은 게 아닙니다. 부도덕한 행위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는 훨씬 근본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자신을 신의 차원으로 높이려는 욕망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교만과 자기 사랑을 죄의 본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문제로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막 2:5)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신성 모독이라고 따지는 서기관들에게 ‘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막 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죄에 대한 오해와 위선을 까발리는 돌직구(直說)였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들이나 그들의 부모가 죄를 범했기에 그런 불행한 운명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충고하고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평가하는 삶의 운명에 떨어져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얼마든지 생명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 바로 회개입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확하게 알면 그제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가 귀에 들릴 겁니다. 그게 들리기 시작하면 전심전력 귀 기울이는 인생살이가 풍성하게 열릴 겁니다.
여러분, 다음의 제 말에 놀라지 마십시오. 아니 기대하십시오.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나무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빗소리의 말도 알아듣고 어둠의 말도 알아듣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과도 대화할 수 있고, 자기 어깨에 내려앉는 한 조각 햇살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천사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사람과 대화하듯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대목도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 경험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 만물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니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대가 됩니까? 그런 사람들이 시인이고 예술가이고 음악가이며, 영성가입니다. 그들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런 세계 안으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텃밭도 가꾸고 가정일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매이션 <귀를 기울이면>이나 <마루밑 아리에티>를 보셨는지요. 저는 최근에 둘째 딸이 추천해준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키워드는 ‘메타포’입니다. 세상 전체가 은폐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연인들의 사랑이 가을바람이나 안개나 조약돌로 표현됩니다. 그런 언어사건이 메타포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 만물의 소리에 전심전력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귀 있는 자는 들으라.”(눅 8:8, 막 4:9, 4:23) 저 말씀을 상투적인 종교 교훈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진리에 이르는 실체가 저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 당장 먹고사는 일만으로 바쁘고 힘들기에 ‘들을 귀’에 신경 쓰면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바랄 수밖에 없네요. 귀 기울여서 들을 줄 아는 영혼의 귀를 허락해달라고 말입니다. 영혼의 귀가 밝아지면 동굴 안에서 살던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온 것처럼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진리의 말씀이 환한 빛으로 다가옴으로써 여러분은 자유와 안식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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