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일차적인 반응은 고통을 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괴로울 때 술을 찾지요? 좀 심하면 마약을 찾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잠깐이라도 괴로움을 잊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심할 때 진통제를 찾는 것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또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안 하던 운동을 열심히 한다든지,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정신없이 일을 한다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다든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는 것도 다 고통을 잊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결국 우리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고통을 삶의 외부로 밀어내는 방식입니다. 60초 시한폭탄을 돌리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한폭탄이 나에게 주어지면 터지는 순간을 피하기 재빨리 다른 사람에게 폭탄을 넘기는 것처럼 고통도 할 수만 있으면 재빨리 내 삶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려고 합니다. 물론 고통을 끌어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고통을 대면한다는 것은 정말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은 피하고 보자, 일단은 잊고 보자, 일단은 밀어내고 보자는 본능적 반응이 나오는 게 자연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고통은 삶의 일부입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고통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안에는 고통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고통이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허망한 기대심리가 있습니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만큼은 예외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뿌리 깊이 박혀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대응방식 또한 일단은 피하고 보자, 잊고 보자, 밀어내고 보자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처럼 고통을 피하자, 잊자, 밀어내고 보자는 의지의 속내를 깊이 따져 보면 고통과 삶을 분리하려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고통을 당해도 고통을 당할 뿐이지 고통과 삶이 만나지는 못합니다. 물과 기름이 한 통 속에 있어도 섞이지 않고 물 따로 기름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고통과 삶도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수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지만 그 깊이를 들여다보십시오. 고통과 삶이 만나고 있습니까? 현상적으로 보면 고통과 삶이 뒤섞여 있고, 고통이 삶을 침범하고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과 삶이 뒤엉켜 있고, 고통이 삶을 침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삶이 조우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삶이 줄기차게 고통을 외면하고, 잊고, 밀어내기 때문에 고통과 삶이 조우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무너지고 자살하는 것도 바로 고통과 삶이 조우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이 삶을 집어 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고통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삶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인 론 이야기입니다. 론은 나이 든 동업자와 함께 약국을 경영하는 젊은 약사입니다. 어느 날 론이 약국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는데, 약물에 중독된 한 청소년이 권총을 들이대면서 약과 돈을 요구하는 거였습니다. 론은 절대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치 수입을 잃어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돈을 꺼내려고 떨리는 손으로 현금출납기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돌아서다가 발을 헛디뎌 카운터를 끌어안듯 넘어졌습니다. 순간 강도는 그가 총을 집으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총을 발사했습니다. 총알은 론의 복부를 지나 척추에 박혔습니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돼 총알을 제거하고 생명은 구했지만, 다시는 두발로 걸을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론이 병원에 있을 때 한 친구 찾아와서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나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목적이 있다고 믿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일이라구. ... 자넨 항상 잘 생기고 건방진 녀석이었지. 반짝이는 차에다가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좋고, 부자가 되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어. 자넨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해 걱정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지. 아마 이번 일은 하나님이 자네에게 보다 사려 깊고 남의 처지에 대해 민감해지라고 교훈을 주시는 방법이었을 걸세. 아마 이것이 자네의 교만함과 거만함을 정화시키시고, 그런 식으로 성공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는 말이지. 이것이 자네를 보다 선하고 섬세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뜻일세.”(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37쪽). 욥의 친구들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론이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처지만 아니었더라도 그 친구의 얼굴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한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 너무 쉽게 의미를 부여하고,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고통을 교통정리해서 덮어버리기 위한 수작에 불과합니다.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인데요, 고통이 죄의 결과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삶에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 삶을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통을 없애버리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시는 것은 삶을 짓밟고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삶을 북돋우고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매우 슬프고 잔인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게 공격당하는지 아십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찔려 피 흘리는지 아십니까? 고통이 삶과 조우하지 못하도록 외면하고 잊고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삶이 분리되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회피하고 잊어버리고 밀어내려 하면 할수록 고통에 대한 두려움만 더 커지고, 더 예민해지고, 더 약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을 회피하고 잊어버리고 밀어내려고만 하기 때문에 고통이 삶을 북돋아주지 못하는 것이고, 삶을 일으켜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통과 삶이 조우하기만 한다면 고통은 의외로 삶을 따뜻하게 감싸 줍니다. 혼돈 속에서 흐느적거리던 삶을 일깨워줍니다. 삶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등 떼밀어 줍니다. 고통이 삶과 조우하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조우하면 고통은 놀랍게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삶 전체를 맑게 정화시키고, 풍성하고 아름답게 자라게 합니다. 뜨거운 불이 도자기를 빚어내듯이 마음과 영혼과 삶을 새롭게 빚어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창37장). 요셉은 야곱이 제일 사랑했던 여자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더욱이 나이 들어 얻은 아들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채색옷은 족장의 후계자나 상속권을 가진 자에게 입혔는데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을 정도로 야곱의 요셉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거기다가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기도 했고, 형들을 무시하는 꿈을 꾸고는 장황하게 꿈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가 형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양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받고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서 양을 치던 형들이 멀리서 오고 있는 요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죽이자고 함께 공모를 했습니다. 르우벤이 요셉을 살리기 위해 ‘목숨만을 해치지 말자고, 피는 흘리지 말자고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자’고 유도해서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은 이십에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고, 또다시 이집트 왕의 신하인 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리는 불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강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고통입니다. 정말 지우기 어려운 상처요 배신입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벅찬 고난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요셉이 고통과 싸웠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거나, 고통을 잊고 밀어내기 위해 심리적인 조작을 했다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요셉이 아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억울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형들에게 분노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분명히 울었을 것입니다. 분노했을 것입니다. 억울해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는 거냐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에서도 요셉은 고통으로 가득한 억울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삶이 왜 이리도 개떡 같으냐며 걷어차지 않았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을 묵묵히 살아갔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현실, 너무나도 잔인한 눈앞의 현실을 발로 차버리지 않고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요셉의 삶과 요셉이 당한 고통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삶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도 않았고, 삶이 고통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도 않았습니다. 고통과 삶이 조우했습니다.
요셉의 삶을 보세요. 고통과 삶이 따로따로가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삶은 한 덩어리였고, 함께 굴러갔습니다. 그리고 삶과 고통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굴러갔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후,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45:5-7). 참 놀라운 고백이요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죽임의 위기를 넘긴 것이나 노예로 팔려간 것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했다는 것은 요셉 자신의 고백만 있을 뿐이지 실체적 증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그 모든 일은 전적으로 형들의 사악함과 보디발의 아내의 간교함 때문에 벌어진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늘을 위해 그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자, 요셉의 이런 해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셉이 해석한 대로 하나님이 팔려가게 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일이 잘 풀려서 과거의 응어리와 분노가 이미 해소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섭리로 덮어버린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뒷부분의 이해는 제쳐두고 첫 번째 이해에 대해서만 살펴봅시다. 요셉이 고백한대로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세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첫째로 형들의 사악함과 보디발의 아내의 간교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둘째로 그렇다면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는 오늘의 축복된 현실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하나님의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 셋째로 우리네 삶의 현실을 보면 모든 고통과 억울한 일들이 이런 식으로 해피엔딩을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신앙적 진술과 사실적 서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고백을 신앙적 진술로 보지 않고 사실에 대한 서술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한 것입니다. 신앙적 진술과 사실적 서술은 다릅니다. 진술은 해석이고 서술은 묘사입니다. 해석과 묘사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본시 서술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직 해석할 수 있을 뿐이지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은 과거의 사태를 서술한 게 아니라 해석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해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진술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과거의 고통스럽고 억울했던 일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하고 진술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매우 진부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저로서는 요셉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고통의 가시에 찔려 피로 얼룩진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고통에 찔려 피로 얼룩진 삶을 살아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담할 만큼 억울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이 왜 이리도 개떡 같으냐며 걷어차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현실을 발로 차버리지 않고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을 신뢰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삶이 분리되어 서로 싸웠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십중팔구 이집트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지 못했다면, 그래서 저들의 씨를 보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이 하셨다’는 놀라운 신앙적 진술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 토대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현실을 발로 차버리지 않고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내는 일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게 뒤따르지 않으면 신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현재의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는 힘이 될 때 신뢰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현재의 슬픔과 고통을 차버린다면 신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뢰 이후에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성경이 고통을 설명하는 방식은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수난이었고, 세상의 모든 고통에 참여한 수난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묻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계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함께 고통당하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극점이었고, 하나님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만난 지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최후의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고통을 당함으로써만 고통을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분이 전능한 분이시고 진정한 통치자이실지라도 고통을 당하는 것 외에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이기는 것이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만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고 해체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고통을 짊어지고 당함으로써 고통을 이기셨던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 길을 가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더 좋은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철학을 공부한 이왕주 교수는 모든 아픔이 우리를 성숙케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버티어낸 아픔, 돌파해낸 고통, 치러낸 번뇌만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더 높은 경지로 밀어 올리는 것이지 진통제나 술이나 마약으로 도피해버린 고통은 우리를 더 약하게, 더 비겁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쾌락의 옹호. 36쪽). 옳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고통도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뒹구는 마음과 영혼은 맑게 정화시켜주고 새롭게 빚어주지만 고통을 내 치는 마음과 영혼은 매우 거칠게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수많은 인물 열전을 보십시오. 요셉은 고통과 함께 자랐습니다. 만델라 남아공화국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도 고통과 함께 자랐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선생도 고통과 함께 자랐습니다. 모세, 다윗, 비울도 고통과 함께 자랐습니다. 소크라테스도 고통과 함께 자랐고, 싯달타도 고통과 함께 자랐습니다. 이들뿐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고통이라는 아픔의 자양분을 먹고 살아야만 그래도 깊이가 있고, 더 높은 경지로 자랄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참아내고, 견뎌내고, 버텨내려 애를 쓰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지난한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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