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고통 앞에서(사38:1-14) / 정병선목사

새벽지기1 2024. 8. 3. 06:27

고통의 문제는 가장 절실하고 심각한 생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구촌 구석구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삶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느낌이 뭔지 아시지요? 고통입니다. 고통보다 더 잔인하고 처절한 불행감은 없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좌우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적대감이고, 나에게 고통을 가한 사람의 행동을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한 고통을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정의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고통의 와중에 있을 때이고,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고통에 휩싸여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가장 치욕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역시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존재와 삶에 가장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고, 가장 넓게 연루되어 있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근원적인 삶의 문제이고, 가장 절박하고 심각한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고통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다차원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눈에 포착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들여다보아도 해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일차적인 유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통 중에는 첫째로 개인의 잘못된 생활습관이나 죄악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교통사고, 도박, 알코올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증, 과식이나 나태함으로 인한 질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만 해도 피해가 엄청납니다. 국토해양부 자료에 의하면 최근 10년간 교통사고 발생건수가 무려 233만1063건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한 건수는 자그마치 6만9907건입니다. 하루 평균으로 하면 교통사고 건수가 640여건,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20여 명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일평생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입는 사람도 있고, 사고 후유증으로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가족 전체가 몰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다 본인의 운전 미숙이나 과속 질주 때문에, 또 음주 운전 때문에 자초한 고통들입니다. 도박이나 알코올중독으로 패가망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과식으로 인해 질병에 시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게임에 중독되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그런 일들이 나옵니다. 엘리사의 시종인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에게 거짓말을 하고 뇌물을 받은 것 때문에 나병에 걸렸습니다(열하5장). 아간은 전리품을 훔친 것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수7장).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에 고난을 겪었습니다(삼상1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도들을 속인 것 때문에 부부가 차례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행5장). 다 본인 스스로 자초한 고통입니다. 본인의 실수나 잘못된 생활 습관, 죄악 때문에 겪는 고난이요 고통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어린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성폭행을 당하는 것, 사기꾼의 거짓말에 속아 많은 재산을 잃는 것, 테러의 희생양이 되는 것,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 부모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 노동자들이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해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 이런 일들은 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요셉도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요셉이 청소년 시절에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것이나,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은 요셉의 잘못이나 죄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을 뿐이고, 놀라운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주인의 유혹을 물리치면서까지 성실하게 보디발의 집사 노릇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형들에게 버림을 당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전히 질투심을 극복하지 못한 형들 때문이었습니다. 간교한 여주인의 사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고통 중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악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고통이 정말 많습니다. 아마 고통의 90% 정도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일 겁니다. 우리가 고통을 말할 때에 보통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악 때문에 겪는 고통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광범위한 공동체의 죄악 때문에 겪는 고통도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의 탐욕과 불의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것이라든지, 독재자의 권력욕 때문에 백성들이 언론의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고 국가권력에 짓밟혀 죽임을 당하는 일들은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받는 고통입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공동체의 죄악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젊은이들은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나가야 되고, 내가 죽지 않으려면 상대방을 죽여야 합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름 없는 생명들이 무참하게 죽습니다. 가족과 부모를 잃은 자들이 거리를 방황합니다. 모든 산업의 기반이 파괴됩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말로 다 풀어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되기를 요구받으면서 쪼가리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기 위해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은 인류대학을 들어가야 한다는 학벌중심 사회의 관행과 부모의 욕심 때문입니다. 또 흑인들이 당한 인종차별의 고통은 인류 전체의 죄악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통은 개인의 결심이나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가하는 고통을 피하기도 어렵고, 공동체 안에 상존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기도 어렵습니다. 흑인으로 태어나면 흑인들이 받는 인종차별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이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피하거나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피할 수 없는 사고나 자연 재해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기상 이변으로 말미암은 홍수와 가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태풍, 지진, 해일, 산사태, 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이나 전염병도 자연재해에 해당합니다. 이런 재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국가 전체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남깁니다. 하지만 콕 집어서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재해가 발생하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선하게 산 사람이든 악하게 산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같은 피해를 입기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공동체의 죄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망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자연 재해가 그 지역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연한 사고로 인한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비행기 사고로 승객 전원이 사망했을 때 그 비행기에 탄 사람들의 죄가 특별하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졌을 때 열여덟 사람이 치여 죽은 것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눅13:4-5). 그렇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 중에는 정말 예측하지 못한 우연한 사고로 인한 고통도 있고,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넷째,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방하기 위해 고안된 생명 보호 시스템으로서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이라는 고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즉각 신경이 통증을 보내 이상이 생긴 부분을 치료하거나 보호하게 해줍니다. 만일 우리 몸이 아픔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우리 몸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이내 곧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인도에서 선교사이자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였던 폴 브랜드가 경험한 일입니다. 한 번은 창고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녹슨 자물쇠가 말을 듣지 않아 낑낑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10살짜리 아이가 웃으면서 ‘제가 해 볼게요. 의사 선생님’ 하면서 달려들더니 열쇠를 자물쇠에 집어넣고 손으로 홱 비틀어 열더랍니다. 브랜드 박사는 나약한 어린 아이가 자기보다 더 큰 힘으로 열쇠를 돌린 것에 놀랐는데, 이내 곧 땅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과 소년의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힘의 비밀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소년은 손가락의 살갗은 물론이고 피하 지방과 관절까지 드러날 정도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천성 무감각증을 갖고 있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입니다. 갓 돌을 지난 아이가 옆방에서 깔깔대며 좋아하는 소리를 내기에, 아기 엄마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발견했나 싶어 가보았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본 엄마가 소스라치듯 놀랐답니다. 아이가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어서 흐르는 핏방울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이렇게라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것은 몸이 예민하게 통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만일 양심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악하고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몸이 느끼는 통증이나 양심의 소리를 듣는 고통은 우리 몸과 영혼을 맑고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고안된 복된 고통입니다. 꼭 필요한 고통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받는 고통도 있고, 의를 위해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간디나 흑인 인권 운동에 온 몸을 불사른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들이 당한 고통은 세상의 불의와 싸우다가 받은 고통입니다. 바울이 당한 고통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받은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날 때부터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을 보고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1-3). 그렇습니다. 고통 중에는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도 있고, 의를 위해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여섯째, 큰 틀에서 보면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작은 틀에서 보면 꼭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일상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죄악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죽음은 죄악이 낳은 괴물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죄 때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 늙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감기에 걸리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질병에 걸려 죽든지, 늙어 자연스럽게 죽든지 죽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조로증이나 다운증후군 등 특이한 질병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부모의 죄나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생활 방식과 문화가 달라서, 기질이 달라서 겪게 되는 충돌이나 고통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시골을 좋아하고 아내는 도시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충돌하는 걸 가지고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고통은 누구 때문에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도 아닙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이 서로가 해치지 않아도 서로가 다른데서 오는 갈등과 고통이 있는 법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콧 팩은 안락사에 관한 책 [영혼의 부정]에서 심리적 고통의 대부분은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현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사람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스콧 팩은 이런 고통을 가리켜 ‘생존적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통의 문제. 50쪽)고 했습니다. 그래요. 삶에는 삶 자체에 내재된 고통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모든 고통이 하나인 것 같이 보입니다. 고통은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고통에도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고통은 자신의 죄 때문이고, 어떤 고통은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죄악 때문이고, 어떤 고통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필요 때문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 때문이고, 어떤 고통은 우리를 육체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보호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이고, 어떤 고통은 자연재해나 우연한 사고 때문이고, 어떤 고통은 삶 자체에 내재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한 묶음으로 처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위험하고,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며 낙심하는 것도 위험하고, 무조건 회피하는 것도 위험하고, 무조건 견디는 것도 위험합니다. 고통의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도 위험하고,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도 위험합니다.

 

고통의 문제는 욥의 친구들처럼 몇 가지 선입견이나 고정된 틀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고통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열린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대면해야 합니다. 고통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지요. 고통을 깊이 응시하기 위해서는 진지함이 필요하겠고, 고통의 잔을 내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함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고통이 어떤 유형의 고통이요 어떤 배경에서 비롯된 고통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의 유형과 배경을 이해한다고 해서 한 순간에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의 이해와 상관없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대면하고 응시하는 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에게 공격당하고 잡아먹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고통에게 공격당하여 파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다가 영혼이 무너지는 사람도 있고, 내 죄 때문이라고 자신을 탓하면서 스스로를 짓이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 어리석음과 잘못된 욕심 때문에 겪는 고통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파렴치한도 있고, 하늘과 땅을 원망하다가 자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이해하게 되면 고통에게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 최악의 재앙은 피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 고통이 내가 회개하고 책임져야 할 고통이라는 게 이해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힘들겠지만 고통을 감내하지 않겠습니까. 책임 있는 행동으로 돌아서게 될 겁니다. 또 지금 이 고통이 억울하고 이해되지는 않지만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라는 게 이해된다면, 그걸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고통을 견뎌 낼 겁니다. 능동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라고 이해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게 될 겁니다. 고통뿐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라도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지혜로운 길이 보이고,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불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죽은 아기를 안고 부처님께 찾아가서 아기를 다시 살려줄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습니다. 부처는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동네에 가서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아무도 죽은 적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얻어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온 동네를 다니며 겨자씨를 찾다가 결국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이 없음을 깨닫고 부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란 참 신비합니다. 고통의 배경을 이해하기만 해도,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해도 고통을 감내할 힘이 생깁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는 모르지만 고통을 감내할 힘이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유대 왕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그는 한창 나이에 병들어 죽을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는 “네가 죽게 되었으니, 너의 집안 모든 일을 정리하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는 사형선고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히스기야는 그때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하겠구나. 사람이 사는 땅에서는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하겠구나. 내가 다시는 세상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겠구나. 목동이 장막을 거두어서 자리를 옮기듯이 나의 생명도 장막처럼 뜯겨서 옮겨질 것이다. … 주님께서 조만간에 내 목숨을 끊으실 것이다. 나는 제비처럼 학처럼 애타게 소리 지르고,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었다. 나는 눈이 멀도록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주님 저는 괴롭습니다. 이 고통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사38:11-14). 그는 코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음만 하지 않았습니다. 절망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실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렸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올려드렸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냉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다는 걸 의미합니다. 물론 마음으로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정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추스르며 현실을 끌어안았습니다. 현실과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히스기야는 고통에게 공격당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고통스러운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죽음이라는 절대 절망 앞에서 몸부림치다가 고통에게 일격을 당했을 것입니다.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호랑이에게 열두 번을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이성의 촉수가 깨어 있으면 고통에게 열두 번을 물려도 죽지 않습니다. 고통의 현실을 대면하는 용기와 고통을 응시하는 진지함, 고통의 잔을 내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힘든 고통이 몰아친다 해도 고통에게 잡아먹히는 참담함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고통에게 잡아먹히는 참담함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고통이 삶의 에너지로 바뀌는 신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고통의 마지막 진실은 이것입니다. 고통이 비록 죽음의 공포보다 더 공포스럽고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짓누를 정도로 끔찍한 것이긴 하나 고통이 우리의 존재를 파괴할만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삶을 흔들고 공격할 수는 있어도 삶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욥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난과 고통에게 우리의 생명까지도 해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주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고난과 고통에게 힘과 무기를 쥐어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에 고통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고통 자체가 우리 존재와 삶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이 몰려오고 어떤 고통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런 현실을 대면하는 용기와 깊이 응시하는 진지함, 걷어차지 않는 신중함,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통을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고통은 때가 되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