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성전으로서의 몸(고전3:16)

새벽지기1 2020. 2. 17. 06:28


성전으로서의 몸(고전3:16)


몸처럼 서러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고

성적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성적 착취의 상이 되기도 하는 몸,

질병으로 무력하게 되고 날이 갈수록 후패할 수밖에 없는 몸이다.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몸이라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듯이

그 속에는 이미 소멸하는 존재의 덧없음이 숨어 있다.

배설, 질병, 노화, 죽음 등등 사람은 누구나 자기 한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대개 사람들은 몸을 거추장스러워하면서도 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응하려 한다.

죄의 유혹은 항상 몸을 매개로 해서 온다.

마음이 제멋로 몸을 끌고 다니는지, 몸이 마음을 담고 다니든지 상호간에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몸은 단순히 혼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몸 없는 마음은 없다.

우리는 보통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사고에 익숙하다.
하지만 몸을 소외시키고 정신을 찬양하면서도 갖가지 옷, 장신구,

심지어 성형수술로 보여 지는 몸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데에만 더욱 열중한다.


1.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로서 몸을 매개로 해서 살아간다.

몸은 행복의 뿌리이자 불행의 원천이기도하다.

몸속에는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다.

현 과학이 의술이 신의 암호를 해독했다고 할 만큼 인간은 과연 위대하다.

이제 사람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창11:6).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이제 신앙인들만의 고백이 아닌 것처럼 별로 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학자들도 예수 없이, 성령 없이 열렬하게 이 신앙을 고백한다.

20세기는 기술복제 시대이다. 모든 것이 일관된 공정 아래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된다.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생명 자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체세포만 있으면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는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이제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제된 나의 분신은 ‘나’인가, 나의 ‘이미지’인가?


가치관의 혼란과 정체성의 혼란은 가중될 것이다.

장애의 몸이 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의 신체만을 떼어다가 자신의 목 위에 이식하는 기술까지

이야기 되고 있는 의학의 발전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 사람은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과학의 진보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가?


2. 부활의 신령한 몸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몸이 다시 산다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관련짓지 않고는 무의미하다.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의 고난으로 죄와 죽음을 감당한 그 상흔의 그 몸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이 싹터 나오는 거룩한 터전이다.

예수의 고난과 관계없는 몸의 부활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야말로

원대한 생명을 키우는 자궁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곳이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간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 일이며,

오늘도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백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 전체로 해야 한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신이 아픈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지 않고,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허구적 신앙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에 한 바른 고백이다.


3. 바울이 말하는 몸 신학의 핵심들


우리는 평생 몸을 지니고 살면서도 몸의 신비를 모르고 일생을 마친다.

엇보다 몸의 가장 큰 특징은 ‘고통과 기쁨’, ‘수치와 광’을 함께 나누고 참여한다는 것이다(고전12:12-27).

어디 그뿐인가? 신체 어느 부분이 다치거나 상처를 입으면 온 몸이 쑤시고 함께 고통을 겪는다.

우리 몸이 ‘살아있는 세포’나 ‘지체’가 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듯이 그

리스도인은 서로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신체의 각 세포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마음, 심장, 뜻, 비전’을 공유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그리스도(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뜻, 같은 목적, 같은 비전을 지닌다.

예수의 고난과 영광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우리 몸이 얼마나 소중하며 영원한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몸의 청결을 넘어서는 부활의 그 날에 우리의 과 육이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동참하는 일이며

영원히 사는 몸의 신비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1) 교회의 본질로서의 주님의 몸
성경에서 교회의 본질과 비밀을 가장 심오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12:27, 엡1:23)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과 생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몸은 다양한 신체조직과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그것들은 또한 수백억의 살아있는 세포들의 집합체로서

몸을 구성하는 각 신체기관들과 세포는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 관계다.

영과 육을 말할 때도 각각 고유한 기관이면서도 철저하게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을 자꾸 육과 영으로 나누고 이분화 시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교회의 본질은 외형적 건물, 성직자들의 조직기구, 혹은 전도나 구제를 위한 방편이나 수단이 아니다.

교회는 하늘이 땅에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의 한 실재가 되신 분을 앙망하며

그분의 신부로서의 본질을 담고 있는 신령한 기관이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세우셨고, 신랑과 신부와의 내한 관계다.

교회의 초석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교회를 소유하시고 그분만이 교회의 기원이시고 창시자이시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다.

2) 우리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
바울은 우주보다 더 거룩한 몸의 양심과 지성소로서의 맨 몸의 신비를 한마디로 갈파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의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구약의 성전이 지향하는 모든 기능인 속죄를 이루기 위한 제사제도와

하나님의 임재의 방편이었던 성전이 어느덧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렸다.

또한 법궤만 앞세우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으로서의 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 부적 신앙처럼 우상화 되어버렸을 때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베드로 성당이 인간의 종교적 탐욕과 맞물려 면죄부를 남발하듯이

오늘날에도 혈육적 인간들은 수천억씩 모금하여 하나님의 성전이라 우기면서 건물 짓는 일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미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충족되었건만

또 다시 하나님을 인간들이 손으로 지은 전에 가두려한다.


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성전으로서의 몸


예수님께서는 40년 걸려 지은 웅대한 예루살렘 성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맨 몸 하나의 신비’에 집중하셨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이렇게 말씀하심은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요2:21).

그 이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3:16)이 되었다.

사도바울은 당시 아테네 도시민들이 모두 자랑하는 ‘파르테논신전’에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날마다 살며 기동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몸이 더 귀한 성전임을 갈파했다(행17:17:24-25).

그뿐만이 아니라 바울은 또한 로마서 12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권고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합당한 영적 예배라고 갈파한다.

여기서 ‘몸’이란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체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생명활동 전체’를 말한다.

삶의 궁극적 목적과 신비는 몸으로 하늘제사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드리는 예배가 곧 합당한 예배요, 이성에 맞는 예배요, 영적인 예배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며,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육체, 지체, 육신, 몸이라는 단어들을 지칭할 때, 성경에서 어떠한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고린도 교회가 헬라 사상의 이원론의 유입으로 구원이란 혼이 몸의 제한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물질과 육체까지 합쳐서 물질에 속한 것들은 다 천하고 값없는 것이라 여겨

육신을 천시하고 혼만을 고귀하고 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지주의 사상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하자.


로마서 6:13절 말씀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드리라는 동사는 너의 몸을 죄에게 계속적으로 드리지 말고(현재 명령형)

나님께 단번에 드리라(부정과거 명령형)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었다.

성전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 안에 성전을 삼으시고 우리 안에 원히 내주하신다.

이 감격 이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