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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대한 소중한 신학(고전6:20)

새벽지기1 2020. 2. 16. 07:47


몸에 대한 소중한 신학(고전6:20)


우리의 몸의 소중함은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변화될 부활의 몸이다.

첫째, 무엇보다 몸의 가장 큰 특징은 ‘고통과 기쁨’, ‘수치와 영광’(고전12:12-27)을 함께 나누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몸은 교회의 본질로서의 주님의 몸으로 지칭되고 주님 모신 거룩한 지성소요, 거룩한 성령의 전이라는 사
실이다. 우리 몸이 ‘살아있는 세포’나 ‘지체’가 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인은 서로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셋째, 신체의 각 세포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마음, 심장, 뜻, 비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그리스도의(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고난과 영광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바울은 우주보다 더 거룩한 지성소로서의 몸의 신비를 한마디로 갈파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바울은 당시 아테네 도시민들이 모두 자랑하는 ‘파르테논신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한사람의 몸이 더 귀한 성전임을 갈파했던 것이다(행17:17:24-25). 그뿐만이 아니라 바울은 또한 로마서 12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권고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합당한 적 예배라고 갈파했다. 여기서 ‘몸’이란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체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생명활동 전체’를 말한다. 삶의 궁극적 목적과 신비는 몸으로 하늘제사 드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전의 참 의미로서의 몸의 소중함에 집중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건물로서의 성전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을 힘입어 살아가는 한 인격체인 사람에게 집중하셨다. 성전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 안에 성전을 삼으시고 우리 안에 원히 내주하심을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구체적인 이웃에 한 사랑을 교훈하셨다. 성경에는 이 사회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하고 돌보아야 하는 이웃 개념이 있고, 몸과 지체의 공동체 의식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한 몸의 지체로서 공동 운명체이다.


성경에서 몸, 또는 육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표현들


육체, 지체, 육신, 몸이라는 단어들을 지칭할 때, 성경에서 어떠한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고린도 교회가 헬라 사상의 이원론의 유입으로 구원이란 혼이 몸의 제한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물질과 육체까지 합쳐서 물질에 속한 것들은 다 천하고 값없는 것이라 여겨 육신을 천시하고 혼만을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사상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하자.


성경에서는 몸(육체)이라는 것은 죄의 원리를 표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생을 거두리라.”(갈6:8)는 말씀과 같이 영원한 가치가 없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6:16-17) 성경에서 성령님과 육체를 대비하는 것은 불신자일 때, 자연인 일 때, 죄인으로서 구원 얻기 이전의 인간이 가지는 속성과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과 생각과 얼마나 상반되는가를 나타내는 단어로써 육체라는 것을 쓴다. 그리스 사람이 생각하는 것 같이 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 이런 이원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거듭나기 전의 그의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을 대표적으로 얘기할 때 육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불신자인 자연인의 삶의 원리를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들로서의 육체, 또는 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와 물질계를 부정하고 욕하는 표현들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 불신자, 하나님을 적하고 반역하는 불순종의 원리와 성품을 표하는 단어로 육체라고 쓴다. 좀 더 큰 의미로 쓸 때는 세상, 혹은 세대라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이보다 더 나갔다. 저들은 형이상학적인 정신과 사상이 형이하학적인 죄와 물질계에서 해탈했다고 여기며 이쪽은 벗어버린 껍질이고 허물이고 그림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초월해 버렸으니 아무려면 어떠냐? 남은 것은 다 허구요, 껍질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이 구정물에 있은들, 시궁창에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고는 별짓을 다
하며 ‘자유’를 잘못 오해하던 것이다. 그 당시 영지주의나 지금의 구원파와 비슷한 종류의 이단 사설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지금 주를 믿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으로 너희 몸을 어디다 바치고 있나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피 묻은 자유를 값싸게 잘못 오해하고 있는 문제다. 우리의 소중한 몸 자체를 괄시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정신이 누구를 좇고 있느냐를 보며 죄로부터 자유인 것임을 몸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from sin)이지, 죄에 한 자유(to sin)가 아닌 것이다.


몸의 신학은 인간의 몸과 사랑, 성, 생명, 혼인, 가정에 한 깊은 관심과 혁명적 혜안,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서구 이원론과 합리주의 사상이 혼과 육체를 철저히 대비시키는 것과 달리 몸의 신학은 둘을 단일체로 바라본다. 예수님이 몸을 버리고 혼만 가신 것이 아니라 그 몸이 부활하셨듯이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이다. 신령하고도 거룩한 부활의 몸으로 홀연히 변화할 그 날을 기대하며 우리의 몸을 잘 건사하는 삶이 아름답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는 말씀과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라 흙에 속한 형상이 하늘에 속한 형성으로 광스럽게 변하는 것이다. 이것의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성경은 몸이 철학적이거나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죄를 지었기에 몸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몸은 존재 그 자체보다는 구원의 유일 무일한 통로가 되는 언약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언약정신으로서의 복의 내용과 또 다른 저주의 내용을 담아내는 언약적 기능으로서의 몸이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