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잇대어놓을 수 있는 사람

새벽지기1 2020. 2. 18. 07:12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잇대어놓을 수 있는 사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고전10:31)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는 참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조차도

나님의 광이라는 높은 뜻과 이어놓아야 한다고 한 다음, 그는 ‘무엇을 하든지’라는 아주 포괄된 말을 덧붙여 놓았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는 사소한 것 같은 일로부터, ‘무엇을 하든지’라고 하여

모든 삶의 역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전체를 다 포함시키고 있다.

어느 삶의 영역도 별개의 것으로 제외하지 않았다.

모든 삶의 영역이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예수 사람의 멋스러움이다.
이 멋스러움은 결코 어느 삶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멋스러움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

담벼락을 넘어, 모든 삶의 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한 주간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광’으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 멋스러움이 우리의 가족과 친분 관계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일터 안으로 퍼져 들어가고, 시민 사회 속으로 번져나가 모든 삶의 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는 시편의 표현으로 ‘바람에 나는 겨’처럼 세상살이에서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의 영광’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기독교 신앙을 일상의 세속적인 일들과 잘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평범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에 눈 뜸을 의미한다.

영적인 신자는 예배와 기도 속에서만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산다.

소란스러운 식당에서도 시장바닥에서도 잡다한 일들을 하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평강과 임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삶의 현장의 영역을 다 포괄하고 구속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설교에만 계시지 않는다.

리의 매일의 일상에도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찬송가 속에만 계시고 당신의 컴퓨터나 타자기 속에는 계시지 않는다면

신의 믿음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엌 속에 들어가 계시지 않는다면

당신의 부엌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이 가는 오락 장소에 모시고 갈 수 없다면

당신이 즐기는 오락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매일의 평범한 삶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다.

자질구레한 일을 위한 성령 충만


성령의 은혜를 성스럽고 종교적인 일에서만 충만해야 한다는 이원론에서 탈피해야 한다.

특별한 성령 충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과 임재가 필요하다.

우리는 쉴 때에 삶의 자세가 흐트러져 죄에 빠지기 쉽다.

다윗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시간이 가장 유혹을 받기 쉬운 때이다.

그러므로 일상에서의 단순성과 지속성의 삶의 스타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건이란 단순성과 지속성에 있다.

특별한 것이라고 떠드는 곳에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

다니엘은 청소년 때에 바벨론으로 붙들려 와서 60년 동안 하루에 3번씩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계속하다 그것이 거룩한 습관이 되고 삶의 양식이 되니

습관이 그를 사자굴속에서도 지켜 주었고 그를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한두 번 잘하는 것은 누구다 해볼 수 있는 경험이지만

지속적으로 잘 할 수 있으려면 갈고 닦은 실력과 내공이 쌓여야만 한다.


여호수아의 여리고 작전도 여전한 방식로 끝까지 잘하는 것만이 최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로 성을 돈다.

7일 동안 13바퀴를 돌았는데 마지막 날에 7바퀴를 돌았으며 순종의 숫자를 채웠다.

그때에 성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여리고 작전은 특별한 방법이 아니었으며, 개선된 방법이 아니었으며,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으며,

더 그럴듯한 방법이 아니었으며, 더 편리한 방법이 아니었으며, 더 독특한 방법이 아니었다.

이전에 하던 그 방식, 6일 동안 해오던 그 방식, 60만 명의 장정들이 깊은 침묵 속에서 나팔소리에 맞추어서

성을 돌고 있는 그 방식, 매우 단순하고 답답해 보이는 그 방식로 7일째 되던 날도 여전히 그렇게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성을 한 바퀴 씩 돌며 마지 날에는 더 일찍 일어나 7번을 돌았을 때 성은 무너졌다.


‘에녹’이라는 구약의 인물이 언급되면 금방 ‘동행’과 ‘승천’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동행 따로 있고 승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승천은 동행에 비하면 순간적이고 극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해 버린다.

승천은 한 순간에 나를 하나님의 영원 세계로 비상하게 한다. 승천은 비약이다.

이에 반해서 동행은 어떠한가? 동행은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도 한 발자국씩 걷는다. 동행은 지상에서 일어난다. 날마다 걸어야 한다.

동일한 자세로 매일 반복해야 한다.

동행은 계속성과 꾸준 성이 결여되면 가치가 떨어진다.

동행에는 생략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적성에 잘 맞지 않는 내용들인지 모른다.

우리는 ‘동행’보다 ‘승천’을 좋아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승천’에 쏠려 있는지도 모른다.

‘동행’이 걷기보다는 ‘뛰는 것’으로 치되고.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야 하는 일이 ‘건너뛰기’와 ‘달리기’로 처리된다.

모두 날고 싶은 승천의 욕구가 현대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개개인 성도의 신앙생활에

거의 절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동행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한다.

우선 속도가 있어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속성과를 선호한다. 실적이 드러나야 한다.

효과가 금방 확고하게 나타나야 좋아한다.

더디거나 단조롭거나 실적이 금방 오르지 않는 것은 인기가 없다.

그래서 단기 완성이니 실적 위주라는 말이 하나의 선전 문구가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모든 신앙적인 원리들은 큰 데서 나타나기 이전에 그 시작에서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정성이 거두는 정성하고 같아야 된다.

김매는 정성과 거두는 정성이 같아야 되는데,

사람들은 거둘 때는 수확물이 있고 그 결과가 눈에 보이고 그래서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은 다 기쁨으로 하지만 뿌리고 김매는 일에는 게을리 하기 일쑤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모습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게을러진다.

어린 소자 하나를 실족하지 않게, 그런 자에게 물 한 컵을 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접하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접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권태로운 삶을 견디며 이겨내는 것


무엇보다 우리가 대단히 하찮게 보이는 일들에 하여 즉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반복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평범한 일들에 대한 도전을 받고 유혹을 받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신앙생활도 뭔가 획기적인 것, 놀랄만한 것들을 해내야만 신앙생활 하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창하고 큰일과 늘 상 일어나는 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인생살이 전반에 걸쳐서 늘 어려운 것은

잖은 이러저러한 권태를 이겨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지극히 적은 어떤 일들은 신앙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고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평상적인 임무를 꾸준히 해 나가는 것, 늘 하고 있는 일, 늘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평상을 유지하며

주님이 허락하신 평안을 잃지 않고 주신 은혜를 간직하며 삶의 여러 부분에서 도전과 유혹과 상처를 받으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에 이 일은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가장 현실적이고 현장적인 일들이다.

거창하고 큰일과 늘 상 일어나는 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어떤 기억할 만한 큰 사건, 신앙적인 웅들이 등장한 사건,

즉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에 한 영웅담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건과 양을 지키기 위하여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것과 국가의 존 패를 가름하는 큰 싸움은

동일하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싸움과 방불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다윗 쪽에서 보면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사자와 싸운 것이나

이제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싸움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자에게서 나를 지키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 나를 지킬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내 양 떼를 치는 것과 곰과 사자를 물리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 임무였다면
그것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똑같은 이유에서 골리앗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 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보면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늑대를 쫓고, 사자를 쫓고 하는 일은 너무나 사소한 일이고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만이 놀라운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같은 질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일에 말씀의 강단이 있듯이 월요일 아침에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월요일 아침에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에서 우리의 삶과 인격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대한 돌풍과 같이 세상 속에 성령의 새바람을 일으켜

이 시대의 풍향을 바꾸어 놓고, 세상 속에 불꽃같이 타올라 세속을 변화시키는

신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들의 삶과 인격은 세상을 감화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설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