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10. 조화

새벽지기1 2017. 10. 1. 07:34


10. 조화

 

1) 건강 신체적 조화 (실제와의 화평)

 

창세기 2:15-17 (참조, 2:1-9)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조화는 부분이 서로 함께 하면서 전반적으로 서로 연결된 것을 뜻한다. 신체의 조화 또는 건강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창세기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은 성경 전반에 걸쳐 주제에 대한 모든 언급을 특색짓는다. 건강 (신체의 조화), 행복 (도덕의 조화), 거룩 (영적 조화) 모두 인간의 삶이 이루려는 주요 목표에 대한 다양한 면들이다. 신체의 조화인 건강은 우리의 유기체와 외부 세상과의 완벽한 균형이다.

 

(1) 멋진 동물을 숭배함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 147:10).

 

멋지게 관리된 건강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구절은 하나님께서 건강, 신체의 조화를 사람이 두려고 하는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체의 건강을 예배하는 현대의 이름은 크리스찬 사이언스다. 건강 숭배의 가장 오류는 사람의 도덕적, 영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점이다.

 

(2) 병에 대한 자세를 숭배함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 39:10; 참조, 39:6-11).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비참의 화려함에 도취한다. 그들이 숭배하는 한가지는 고통, 아픔, 약함, 고통에 예민함 등이다. 아픈 태도를 숭배하는 것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안정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유는 시대마다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사람들 대부분이 다들 어느 정도는 신체적인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엘은 높은 예민함과 교양을 갖춘 남성이었는데 살아있기 조차 벅찰 정도로 병이 심했고 또한 평생 병약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에 썼다. “병이 가장 먼저 호출하는 것은 신적 가치이다. 비록 병마들은 악하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정말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내려오는 호소,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마음으로 채찍을 대시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러한 자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픈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를 숭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병에 대한 성경적 입장은 믿음-치유(faith-healing) 믿는 사람들의 자세와 전혀 다른다. 성경적 입장은 하나님이 병을 보내시거나 또는 병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병은 하나님과 사탄에 의해 사용되는 사건으로 본다. 절대로 당신의 자신의 체험 위에 원칙을 세우지 말라.


개인적 체험은 이러하다. 나는 생애 가운데 한번도 아무 탓할 이유가 없이 아픈 적이 없었다. 병이 내게 허락되었는지 이유를 알기를 주께 구할 때마다 나는 결코 잊을 없는 교훈을 배웠다. , 나의 신체적 건강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코 당신의 믿음을 어떤 교리나 다른 사람의 언급에 두지 말라. 대신 하나님의 책을 붙들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영적인 성품에 정확하게 맞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개인적으로 다루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취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오리 무중에 빠진다. 하나님의 책은 사실들을 다룬다. 건강과 병은 공상이 아니라 사실들이다. 성경에는 지금 우리 시대처럼 기적적으로 치유된 여러 경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 치유의 기적들이 발생하였는가? 우리가 사건들을 흉내내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건들은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분별할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건강이나 병의 사실에 기인되는 화평은 무지한 것이며 위험한 것이다. , 건강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은 평안 때문에 그들 마음은 종종 무디어진다. 반면에 병든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건강한 모든 것을 향해 비뚤어진 눈을 갖기 쉽다. 사람이 건강을 우상으로 만들때 이는 피조물 중에 가장 잔인한 우두머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주제를 애매하게 두며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겠다. 사실 답이 없을 있다. 가장 곤란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답변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일어나는 사실들을 증명할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건강의 사실, 병의 사실은 항상 있다. 우리가 선택할 있는 사실들이 아니다. 건강과 병은 오고 간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다른 차원, 도덕적 차원과 다음 차원인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2) 행복 도덕적 조화 (원칙과의 화평)

 

행복 또는 도덕적 조화는 성향과 우리의 상황 가운데서의 완벽한 조화이다. 원칙과의 화평은 사람의 도덕적 속성이 조화의 상태 가운데 있게 한다.

 

(1) 고결함(Integrity) 긍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18:11).

 

고결함은 아무런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고결함 가운데 사람이 느끼는 긍지는 행복함을 만들어낸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기도한다면 기도는 높은 하늘 위에서 평안함의 독백일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행복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혼자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을 보라. 그리고 사람 자리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것이다. 당신은 그가 어디에 사는 지를 알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자기-의에 만족해 하는 이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주의하라. 바리새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자신의 지성과 도덕적 행위로 행복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행복은 하나님과 마귀에게 난공 불락이다. 이러한 행복의 상징이 있다면 얼음이다. 만일 당신이 모든 종류의 도덕적 또는 비도덕적인 성품을 분석해 보고 싶다면 성경을 들여다 보라. 누가복음 18장의 그림은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의 그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거룩함에서 만족을 얻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죄악으로 인한 고통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18:13).

 

상태는 원칙과의 화평이 무너진 상태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 39: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준히 반복하시는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도덕적 화평을 누리는 자들은 악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훨씬 마귀에 가깝다.

 

신체적 그리고 도덕적 조화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 사람의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외부 세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도덕적 조화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은 사람이 도덕적 안녕을 희생시키면서 신체적인 건강을 유지할 있고, 또한 영적인 안녕을 희생시키면서 행복을 느낄 있음을 계시한다.

 

3) 거룩 영적인 조화 (하나님과의 화평)

 

영적인 조화 또는 거룩은 우리의 성향과 하나님의 모든 사이의 완벽한 균형이다. 당신의 기질, 사건들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신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드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새로운 성향을 심으신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을 바꾸시지는 않으신다. 성도는 새로운 성향에 따라 그의 기질을 형성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을 주시기 , 당신이 성결의 삶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당신의 경험들을 돌아보라. 당신의 기질과 감각은 어떤 사건들을 대하면서 당신 안에 공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그러한 사건들을 완전히 다른 태도로 대한다. 이러한 자신을 보면서 당신은 내가 이렇게 둔해진 것일까!”라고 말한다. 전혀 둔해진 것이 아니다. 당신은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의 기질은 성향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성향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사건들을 보시는 관점에 동감하게 되면서 당신은 이제 이상 감각의 동물이 아닌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감각을 훈련시키는 것이 어려워서 낙심해 있다면 실망하지 말라. 다시 도전하라. 처음에는 우리의 감각들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걸려 넘어지기 쉽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위의 보좌에 계시더라도 당신이 바로 그분의 명을 수행하는 총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1) 공포가 만질 없음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 112:7).

 

우리 주님은 한번도 신체적, 도덕적, 지적인 당황스러움을 겪으신 적이 없다.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안에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 2:24-25). 당신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당신의 감각이 당신을 어떻게 공포로 몰아갔는지를 보라.  또한 공포 속에서 현실들을 거짓으로 믿으려 했던 당신 자신을 기억해 보라. 사탄이 성도들을 사로 잡을 그는 인간의 감각을 이용한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지니라” ( 1:12).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내용으로 ,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는 성향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온전히 깨어있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의 감각을 건드려 속박할 있다. 당신이 영적으로 속박을 느낄 때마다, 지옥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당신은 잘못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절망, 당황)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사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전혀 공포에 빠지지 않는 누군가를 알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축복이며 당신은 사람을 언제나 의지할 있다. 당신은 조급한 상태에서, 불처럼 타는 신경질 가운데, 머리는 백지같이 비고, 가슴은 거의 죽어가는 나비같이 펄럭이는데, 사람에게 가면 2-3 내에 평정을 갖게 된다.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인가? 사람으로 인해 당신 안에 나타난 변화는 이상 당신 자신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생명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마음이 모아진 것이다. 거룩은 공포가 건드릴 없다. 바울은 환난 가운데말한다. 환난이 무엇인가? 팥죽이 끓어 오르는 그림이 환난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난 가운데 내면의 평정을 누리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며 이러한 성품의 사람만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로 우뚝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해 서신 것처럼 그렇게 있는 성향을 자신들 안에 지닌 사람들은 결코 환난 가운데 당황하지 않는다. 악한 자들은 성도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없다. 세상의 눈에는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언제나 불합리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환난이 오면 그들은 성도를 보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2) 박해에 의해 꺽이지 않음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 112:10).

 

하나님의 책은 내내 거룩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위에 있는 동네(도시)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5:14). 주님은 제자들에게 늑대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진리를 증거할 때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격분하거나 조롱하는 것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연스럽게 겁장이들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성향을 바꾸어 주실 우리는 겁장이들이 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시는 성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붙들기 때문이다. 성도의 가장 주된 특징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철저하게 공감하는 것이며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책에는 두개의 평행선이 달린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그러하다. 그의 공중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다룰 때를 보라.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엄하며 조금의 양보가 없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을 대할 때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으로서 다정하고 친절하게 다룬다. 오늘날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현대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대충 쉽게하라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설교의 기준을 보라.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들의 기준에 설교를 맞추는 것이 첫째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가 막혀 있다. 그렇다. 막힐 밖에 없다. 감히 진리를 설교할 없다.

 

하지만 당신이 개인의 구원의 충만함을 설교하는 즉시,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완벽한 조화 가운데 있는 성향을 받아야 하며,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낼 있도록 힘을 준다는 진리를  선포하면 사람들은 가책 분개와 당황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결코 핍박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감춰 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이 동료들을 다루게 당신의 자세는 어떠한가? 항상 기억하라.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또한 거룩한 면에서 뭔가를 이루었다면 누가 당신을 현재의 당신으로 만드셨는지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내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것이라” (고전 15:10) 말한다. 무한한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영혼들을 대하라.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래 참으신 것처럼 당신도 당신 자신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기껏 2 정도 성결한 은혜 가운데 살아왔으면서 20년의 은혜를 받은 만큼 성숙하고 강하지 못한지, 성급한 가운데 영적으로 골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당장 성화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주의 은혜로 자라나도록 인내하라. 영적 위험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보다 부분에서 훨씬 많다 (참조, 12:5-11). 마귀는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들어오는 즉시 모든 것이 마쳐졌다고 새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룩하게 것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무리된 사역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정되었지만, 지금부터 달성을 시작하는 것이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기( 4:15)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 가지는 다함께 천천히 자라난다.

첫째, 영적인 거룩함을 기반으로 하여,

둘째, 도덕적 행복을 세워가며,

셋째, 신체적 건강으로 장식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성장한 사람은 정확하게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4:13).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죄의-철학-10-조화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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