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7. 유혹

새벽지기1 2017. 9. 20. 07:15

7. 유혹

 

고린도전서 10:12-13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유혹(Temptation)이라는 단어는 계속 사용되어 내려오는 단어인데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 유혹은 죄가 아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를 받는 것이다. 유혹이란 유혹 받는 자의 속성에 잘 맞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혹은 유혹 받는 대상의 속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모든 사람은 각각 나름대로의 유혹을 받는다. 유혹을 잘 설명하는 예는 철이 시험받는 방법이다. 철은 시험받는 과정에 부하가 걸리는데 걸리는 부하를 통해 내구력이 점검된다. 유혹은 어떤 인격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 소유들이 외적인 힘에 의해 시험되는 것을 뜻한다. 유혹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을 설명하여준다. 주님은 주의 위격(인격) 안에 인류의 왕이시며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붙들고 계셨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성경에서 사탄이라고 불리는 외부 세력이 찾아와 주를 시험하였다.

 

유혹은 인격체의 소유들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하는 모진 시험이기도 하다. 유혹은 순진 무구함(innocence)을 성품으로 훈련시킬 수 있고 또는 타락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유혹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유혹들을 대해야 하는 더 높은 차원에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추슬러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후로부터는 전에 의식하지 못했던 영적인 유혹의 세력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1) 유혹과 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2-15).

 

유혹은 죄와 크게 다르다. 유혹은 원하는 목적의 경로지만 복잡한 상황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사람은 그 딜레마 가운데 어떤 요인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죄 지을 가능성과 죄를 짓는 경향은 서로 다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있지만 살인하는 경향은 없다. 죄의 경향은 그 경향이 실천에 옮겨지던 말던 행위와 다름 없다 (롬 2:1; 요일 3:15). 사탄에게는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었다.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경향을 띄었다. 아담에게도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었다.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그에게 찾아오자 그는 뜻을 다해 불순종의 경향을 띄었다. 그 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성향은 온 인류의 유전 형질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의 성향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반란이다. 그 성향이 남아 있는 한,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경향을 찾아낸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죄의 성향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면 유혹의 시간은 내 안에서 죄의 경향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가능성만을 시험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도 불순종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딜레마에 빠뜨리는 유혹이 그에게 왔을 때, 그 유혹은 불순종의 경향을 찾지 못했다. 주님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마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진다 (참조, 히 2:11; 4:151-6). 중생을 하고 거룩하게 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의 일반 특징이 무엇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죄없는 완전함이라는 이단(the sinless perfection heresy)은 이 부분을 혼동한데서 야기된다. 이 이단은 죄의 성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감사하게도, 죄의 경향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죄의 가능성이 제거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불순종의 세력이 제거되었다면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은 영광스럽지만, 그렇다고 하여 결코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여진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도덕성은 이 시대의 질서에 있어서 전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넉넉히 이긴다 (롬 8:37).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는 시험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유혹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 우리는 다른 영역으로 올려지게 되면서 다른 종류의 유혹들을 접하게 된다. 즉, 우리 주님께서 겪으셨던 종류의 유혹들이다.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들은 자연적인 인간의 속성 안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주님이 받으신 유혹들은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 인간 내면의 성향, 즉 인간이 자신의 인격성 안에 소유하고 있는 것은 외면적으로 그가 무엇에 의해 유혹 받는지를 결정한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다스리는 성향의 선상에서 찾아온다. 죄는 자아-사랑의 성향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권을 부추기는 모든 유혹에 굴복한다. 죄는 글자 그대로 자아-중심적 통치로서 하나님이 없이 자기 삶을 다스리려는 성향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성향에 의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탐하도록 배운다. 욕심은 바른 성품을 왜곡시켜 타락으로 이끈다 -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보여주는 종착지는 특별히 황홀해 보인다. 대단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욕심은 만일 그것이 명성이 아니라 치욕을 가져온다는 고려로 인해 저지되지 않는다면 앞을 다투어 질주한다. 욕심이란 나는 당장 그것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내 욕구가 만족되어야 한다. 나는 그 어떠한 제지도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을 의미한다. 유혹에 지면 그 사람의 삶에 죄가 싹트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야고보서 1장의 이 구절은 유혹의 자연스런 과정을 말해준다. 성경에서의 욕심은 비도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쓰인다. 욕심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당장 가져야 한다는 정신이다.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욕심은 우리의 우상 신이 된다.

 

우리 주님의 삶에서 유혹의 기간은 영적으로 높임을 받은 직후에 찾아왔다 (참조, 마 3:16-17; 4:1). 이는 시험하는 세력의 기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역사적 유혹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릇된 방법으로 이루라는 선명한 그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상 죄를 감당하라는 사명을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곧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귀가 시험하는 곳으로 이끌리셨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지 않으셨다. 주님은 죄 없이 유혹을 지나시고 주의 인격 안에 있는 소유들을 그대로 유지해 내셨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 당신이 유혹을 잘 이겨냈을 때 나타나는 표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2) 유혹과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16).

 

외부 환경은 내면의 욕구에 정확하게 대응하도록 형성되는데, 각 사람마다 다른 환경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의 유혹은 가룟 유다의 유혹과 전혀 다른데 그 이유는 내면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당한 유혹은 실제가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실제 유혹이 아니었다면 우리 주님의 유혹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단지 우스개 소리이며 현혹시키기 위한 것이 된다. 또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말한 히브리서 저자는 진실하지 않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받으실 수 있으셨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다. 그 이유는 유혹과 죄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유혹과 예수님의 유혹은 성격상 매우 다르다. 평범한 우리에게 임하는 유혹들은 죄의 성향으로 인해 모이는 것들이다.

 

누가복음 3:23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라고 알려주고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람이 성숙하여지고 모든 힘이 완벽하여지는 때가 바로 삼십 세 때이다. 성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때이다. 그때까지는 인생은 약속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터는 시험과 성취가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신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그를 보호하시던 손을 떼시고 마귀로 맘껏 최악을 행하도록 하셨다.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과 우리의 유혹은 우리가 거듭나서 주님의 형제가 되기 전까지는 (히 2:11) 서로 다른 영역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어떻게 유혹을 받으셨는지에 대한 기록이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으로서 유혹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혹들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당하는 그러한 유혹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당하신 유혹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유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 2:17). 그분의 형제들이란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반 사람들인 우리들처럼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없다. 중생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면 주님은 주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가지셨던 똑 같은 상황을 우리의 신체적 삶 안에서도 그대로 갖게 되신다. 당신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을 둘러싼 상황들 가운데서 주님께 항상 충성하겠는가? 마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는 이미 우리를 죄 가운데 붙들기에 충분한 욕심이 다 있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게 되면 유혹은 순식간에 바뀌며 이제 유혹이 조준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거듭남으로 통해 임한 새 성향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인격적 생명 안에 담긴 것, 즉 이 세상의 구세주시며 인류의 왕이신 사실을 완성시키기 위해 시험을 받으셨다. 사탄의 유혹은 주님이 그 완성을 지름길로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주님의 유혹들은 주님 자신의 성향에 의해 정해졌다. 주님은 욕심이 없으셨으니 욕심에 의해 유혹을 받으실 수 없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주의 성육신하신 목적을 달성시키는데 있어서 하늘 아버지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취하도록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예수님께 광명의 천사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혹의 핵심 내용으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당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우리 주님의 모든 답변의 중심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는 것이었다. 사탄은 우리 주께서 그가 제안한 지름길을 취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를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참조, 요 6:15).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탄이 제안한 그러한 차원에서의 인류의 왕이 아니셨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고통을 전혀 피하지 않는 멀고 먼 길을 택하셨다 (참조, 히 2:9-10).

 

3) 유혹, 죄인과 성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8).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셔서 다른 종류의 유혹을 겪게 하시는 것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모두 겪지 말아야 할 쓸데 없는 유혹들을 겪게 된다.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자연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1)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자연적 생명 안에는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최선을 이룰 것이다. 내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 내 자신을 훈련시키려고 한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기까지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목표는 자아-실현이다. 자연적으로 우리의 인격이 가진 특별한 소유들은 끝까지 버틸 힘이 있는지 외부적인 힘에 의해 시험을 받게 된다. 이때의 유혹은 우리가 악이라고 알지 않고 선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향하게 한다 (참조, 눅 16:15). 유혹은 한동안 우리를 완전하게 혼란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그 유혹이 바른 것으로 이끄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영적인 삶은 마법의 알약을 먹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에 의해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하게 보이는 것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시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적인 삶과 도덕적, 영적인 삶의 기초는 똑같다. 우리가 각 영역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싸움에 의한다. 건강은 나의 신체적 생명과 외부적 자연 간의 균형이다. 만일 내면 속에서 싸우는 힘이 줄어들거나 손상되면 나는 병에 든 것이고, 외부의 것들이 나의 생동력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도덕적 삶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덕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내 안의 덕의 원수다. 내가 내 안에 얼마나 강한 도덕적 도량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덕의 원수를 이기고 덕을 세울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만일 영적으로 싸울 충분한 힘이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닮은 성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성품은 이루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를 잘못된 것들로 유혹하지 않는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넣으신 것을 우리가 잃게 되도록 애를 쓴다. 즉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없애려고 한다.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핵심 무기는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 안에 그대로 임한다. 즉, 내 자신의 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게 만든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성향을 통해 사탄이 이루려는 모든 목표는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사탄은 절대로 잘못을 행하거나 죄악의 책임이 있는 존재로 제시되지 않고,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는 악한 존재로 제시된다.

 

유혹에는 제한이 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혹 자체를 막아주시지는 않으신다. 대신 주님은 유혹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히브리서 4:15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시험은 타락한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시험이 아니라 거룩하게 된 영혼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시험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께서 주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은 야고보 사도가 언급하는 시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끌려 받은 시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를 보호하시던 손을 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결의 역사를 지나 성도의 삶이 참으로 시작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주의 손을 떼시고 세상이 그 모든 최악을 우리에게 행하도록 두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 안에 있는 주님이 그를 대항하는 자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때문이다.

 

[출처] 7. 유혹|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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