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4. 실체

새벽지기1 2017. 9. 13. 08:18


4. 실체

 

내 영혼 깊은 곳 어딘가에 비밀스런 내가 잠들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깊은 잠에서 나를 깨우지 않으며

친구마저도 주위의 구름을 흩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행운의 책에는

어느날 음악을 연주하는 손길과 함께 음성을 듣게 될 때

잠든 내가 온전히 깨어 일어나 가장 충만한 삶을 살게 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9:23).

 

실체(Reality)란 우리의 생명 가운데 숨겨진 모든 능력이 그 자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또한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러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실체가 실제로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순종하면서 조금씩 실제가 되어간다. 이는 가짜인가 실체인가, 위선인가 실체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진심(sincerity)이 실체로 변형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진실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이것은 실체가 아니다. 유일한 실체는 내 자신 및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실체를 향하여 역사하시며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그 실체를 향하여 수고하게 된다.

 

1) 자연적 차원에서의 자아-실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생명이 시작될 때는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주변 사람들과 자기를 구별하려는 자아-실현이 없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라나며 자기를 실현하기 시작하면서 자아를 의식하게 되고 그의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더니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점점 자만에 빠지거나 아니면 우울에 빠진다.

 

(1) 개별주의의 느낌 

사람의 인생 가운데 매우 결정적인 순간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다.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 자신에게 법이 된다. 이 의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나름대로의 구실을 대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는 그 구실을 적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내가 받은 유혹은 특이한 것이야. 내 상황은 너무 이상해. 내 속에 있는 그 특이한 세력들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거야.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은 불법과 모든 부도덕의 씨앗이 뿌려지는 때이다.

 

(2) 직감의 느낌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는 느낌, 내게는 특별한 직감이 있다는 생각은 개별주의의 느낌보다 더 위험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느낌은 영적 기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종교적 속성을 띈 영적 기만은 자연적인 속성에서의 지적 교만과 견줄 수 있다.

 

(3) 고립된 느낌 

외로움을 느낄 때 잘못된 애착에 빠질 위험이 크다. 아가서에 있는 이 놀라운 구절을 주목한 적이 있는가?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 2:7, 3:5).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힘은 영혼의 참된 연인,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전에 영혼의 사랑을 흔들어 깨우려 한다. 교회에서 복음을 위하여 봉사할 때 영적인 면보다 도덕적인 면을 더 강조하게 되면 이러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성도가 복음적 봉사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갑자기 이를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서 생각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도덕적 기준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하는 영적인 일들이 논리적이지 않게 보인다. 또한 혼자 외롭게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때 두려움이 찾아오고 동료를 구하게 되는데 사탄이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 오랜 격언을 기억하라. 너무 오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마귀가 문을 열지도 모른다. 성경은 바른 인내도 있지만 잘못된 인내도 있음을 지적한다. (역자 주 - 영적으로 고립되지 말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 안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쓸데없이 홀로 오래 있다보면 사탄이 틈탄다는 의미이다.)

 

자연스럽게 자아-실현을 한다는 의미는 자연적인 선상에서 나의 속성을 개발한다는 뜻이다. 나는 개별적인 존재이기에 나와 같지 않은 그 누구도 나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신경쓴다. 내 영혼은 내가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자연적인 속성을 향해 강한 애착을 느낀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동료가 되어줄 친구들을 선택한다. 한편 하나님의 성령은 주께서 창조하신 이러한 자연적인 취향들이 바른 채널을 통하여 흘러오지 않으면 강하게 거부하신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런 신체의 성장과 함께 여러 종교적인 표시들이 나타나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이 많다. 10대의 청소년들 중에는 놀라울 정도의 종교적 취향을 나타내는 소년 소녀들이 있다. 이때 이러한 종교적 취향을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역사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에 사역자들은 영적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영적인 생명이 있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된다. 성령의 역사가 아닐 때는 하나님을 향한 인식이 애매하다. 젊은이들에게는 이것 저것 아무 것에나 열망이 많고 간절함이 크지만, 그 열망과 간절함은 하나님께로 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에게 가장 큰 필요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 있어서 가장 최상의 순간은 누구든지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엄청난 중보의 능력이 여기서 역사한다. 복음의 부모님들, 선생님들, 친구들이 그들의 자녀의 삶에서, 학생들과 친구들 삶에서 이러한 영적 각성의 순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러한 각성의 순간들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꼼짝 못하게 붙드시고 그 친구들의 참 친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신다. 당신에게 중보기도의 중요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마귀가 가장 염려하는 한 가지는 중보기도이며 끝까지 우리에게 못하게 막으려는 것도 중보기도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는 중요하지 않아. 그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잖아라고 하면 마귀는 안심한다. 먼저 선수를 쳐서 마귀를 막으라!

 

우리는 인간들의 자아-실현의 속성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한다. 매우 어릴 때부터이거나 그 후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중보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주께서 우리에게 중보 기도하라고 보낸, 또한 경고할 수 있도록 보낸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얼마나 눈이 가려져 있고 무지하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대신에 그들의 잘못을 발견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일은 기도다. 그래서 각성이 찾아오면 그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자연적인 선상에서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거나 아니면 망치게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의 자연적인 선호에 잘 맞으면 그들은 마치 초기의 제자들처럼 자연스럽게 예수님께 매료된다. 아직 거듭나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자연적인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료된 것이다. 이러한 삶에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세상, 육체, 마귀가 그 사람을 먼저 사로 잡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찾기 전에 대혼란이 따라야 한다.

 

2) 그리스도-실현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자아 실현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과 일치할 것을 요구하신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분명한 충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은 가장 준엄하시고, 분명하시고, 넘치는 능력의 말씀을 소유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킴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 데니

 

자아-실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고려치 않는다. 예수님께서 살던 죽던, 무엇을 했던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는다. 죽음과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자아-실현은 그리스도-실현과 완벽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상반된다. 참된 자아-실현은 우리 주님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그 실현은 하나님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조화를 이룬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17:22) 라고 기도하신다.

 

(1) 금욕의 힘 

금욕은 뭔가를 포기하려는 열정으로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들의 삶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만일 금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길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한다면 귀한 것이 될 것이다. ,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금욕이 이러한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금욕은 사람들의 삶에 무한한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성결하게 된 영혼 안에서의 금욕의 힘은 제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프로그램에서 순교가 얼마나 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계속 하셨다. 주님께 충성하려면 가장 친한 관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거룩하여진 후에 주님을 알게 된 자들에게 이 말씀이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너무나 거칠게 들릴 뿐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그가 주님께 충성하는가 아닌가에 달렸다고 선포하는 이 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생각해보자. 그분은 완벽한 충성을 요구하시는데 이 충성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희생하는 것, 또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에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하신다. - 데니.

 

(2) 몰두되는 열정 

자연적으로 각성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주님의 완벽한 매력에 몰두된다. 그는 죄에 대한 책망도, 성령도, 심지어 믿음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몰두되는 열정을 갖는다. 대단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성숙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매료된 상태에서 책도 쓰고 집회도 인도한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 모자른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 모자른데, 뭘까? 그들이 빠뜨리고 있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가졌던 그 관계를 하나님과 갖도록 인도함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쓴 찬양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찬양들 속에는 성도에게 필요한 진정한 힘이 담겨 있지 않다.

 

몰두되는 열정은 또한 성결의 초기 단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마 다른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구별된 생명의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 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 부인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들 단어에도 없고 생각에도 없다. 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이 단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하는 이 한가지로 이끌지 못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된다.

 

(3) 동경하는 인내 

예수님께서 자연적인 생명을 만지시면 그 삶은 계속되는 헌신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언제나 원한다. 언제나 기도하길 원하고 신앙 서적을 읽길 원한다. 어떤 자연적인 생명은 황홀의 경지까지 간다. 그러나 성결하게 된 생명의 특징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된다. 그 삶은 뜨거운 에너지가 차고 넘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동경심이 생긴다. 바울이 말하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2:20)고 하였다. 정체성이 바뀌었으며 예수님께 있었던 그 믿음, 그 속성이 이제 내 안에 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구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충만하게 이루기까지 자라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 4:13). 우리는 이 일을 홀로 이룰 수 없다. 

 

3) 영적 차원에서의 자아-실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결의 첫번째 체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자리가 끝이 아니다.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적인 정체성을 잃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정체성을 의식하며 얻게 된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된 영혼을 다루시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어두움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이상하다고 오해하는 그러한 때를 지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신 것을 배운다.

 

나의 목표는 하나님 그분이지, 기쁨이나 평화가 아니라네.

심지어 축복도 아니고, 오직 그분, 나의 하나님이라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16:12).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주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다.

 

(1) 인내의 헌신

 

십자가를 지고…”

 

성결의 삶의 미성숙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분명한 인내의 헌신으로 발전한다. 영적인 성급함이나 모든 당황스런 마음이 사라지고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뜻을 더욱 깨달아간다. 우리가 꾸준하게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헌신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 삶을 벗어나게 하는 어떠한 유혹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는 믿음의 참 생명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2) 평범한 나날들

 

날마다…”

 

참 생명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은 성도의 체험에 있어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진정한 삶은, 즉 예수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삶은 특별한 환희의 체험없이도 꾸준하게 매일의 일상적인 삶과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기도회의 예수님, 부흥회에서의 예수님,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변화산 상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변화산 상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순간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일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1:29). 이것이 실체에 대한 시험이다. 독수리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거나, 달려도 지치지 않는 (참조, 40:31) 체험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걷지만 지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며 예수님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족시키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평범한 하루 삶, 유별나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삶이지만 오직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놀라움을 드러낸다.

 

(3) 꾸준한 헌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마음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으로 인해 순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앞에는 오직 한분만 계시는데 그 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다른 사람들은 성도들이던 죄인들이던 그림자일 뿐이다. 헌신된 삶의 특징은 꾸준함이다. 영적 경련은 돌아올 때 또는 떠날 때의 삶의 특징이다. 만일 누군가가 계속적으로 그냥 내 버려두었으니 이제 긴장해야 한다. 용기를 내어 일하자라고 느끼고 있다면 그는 참된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가고 있던지 아니면 정반대로 진짜 죽음으로 가고 있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하나님과 우리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 영적인 차원에서의 자아-실현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본으로 하게 된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 거짓 제자로 드러나느니 목을 메고 가장 비참한 죽음을 죽는 것이 낫다. - 데니

 

순교 사상은 성도의 삶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 언제나 순교의 모습을 사용하셨다 (참조, 21:18). 순교의 단계에 이른 성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묻는 지점을 통과한 상태다. 그가 하나님의 뜻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나를 축복하시고 저곳에서 나를 사용하시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나는 승리를 얻었네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순교의 단계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로 만드신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로 사용하시도록 한다.

 

이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목적이 우리 마음과 가슴에 새겨지길 바란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나로 묶어 완벽하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영적인 어린아이가 아니며 우리의 생각과 가슴 속에서 구속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제 서서히 분명하게 성숙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자랑스럽게 추천하는 삶을 산다. 천사들이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솜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살후 1:10).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죄의-철학-실체 [목양연가(牧羊戀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