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3. 구원

새벽지기1 2017. 9. 11. 07:19


3. 구원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 51:50).

 

구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위대한 단어이다. 이 단어에 상당하는 다른 단어도 없으며 이 단어의 의미를 감출 수도 없다. 구원은 죄악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단어를 가장 적절하게 정의를 내리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의 의미를 제한한다. 거듭남에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정죄함과 관련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구원을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1) 구원에 있어서 파멸되는 요소들

 

칼을 면한 자들이여…”

 

예레미야 51장은 전체가 불로 타오르고 있다. 강하고 맹렬한 파멸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파괴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준다. , 주님의 것을 구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파괴를 위한 파괴를 볼 수 없다. 인간 및 사탄은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것을 구하시기 위하여 악한 것과 마귀를 멸하신다.

 

(1) 칼의 목적 

칼의 목적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에서 첫째 단계는 파괴이다. 이 단계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부분이다. 이를 마음에 두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돌아보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10:34). 우리 주님은 죄를 은폐하면서 누리는 모든 평화와 행복과 무지를 파괴하는자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비교, 3:10).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들린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화평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한 가지는 사람들의 참된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번창하고 평화롭다는 사실이 그들이 하나님의 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들이 행복과 평화와 안녕과 안일함을 누리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삶이라면 오래지 않아 칼을 맞게 될 것이며 결국 그들의 모든 평화와 쉼과 기쁨은 파괴될 것이다.

 

(2) 칼의 위험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게 들리지만 사실 위험한 말이다. 잘못 오해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절대로 죄인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안에 더 이상 죄인이 없게 만드신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란 표현은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란 뜻이다. 만일 죄인이라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파괴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오직 한가지 결론 밖에 없다. 내 죄와 함께 내 자신도 파멸하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의 빛은 죄를 책망한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 15:22-24). 죄는 의식되지 않는 한,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구원의 요소 속에 파괴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쉽게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분과 내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된다. 감출 수도 없으며 변명할 수 조차 없다. 만일 주께서 드러내신 죄악으로부터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허락하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주님이 파멸하시고자 하는 것들과 함께 파멸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3) 칼의 힘 

고대 전설에 어떤 대장장이가 엄청난 칼을 만든 후에 유명하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주장하길 그 칼은 그 어떠한 방패도 한 칼에 쪼갤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은 그의 자랑을 듣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왕이 가지고 있는 방패를 자신 앞에서 한 칼에 쪼개라고 말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허튼 자랑을 하였기에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대장장이는 방패 주위로 가볍게 칼을 한번 휘두르고 다시 칼집에 넣었다. 왕은 대장장이에게 결투를 신청하려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흔들어 보십시오. 폐하라고 말하였다. 왕이 방패를 흔들자 그 방패는 둘로 쪼개어져 있었다. 이 전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칼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예화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4: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의 죄를 효과적으로 다룬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위기를 가져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저 밑바닥부터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사람이 같을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 후에 위기가 찾아오면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목을 잡아 조인다. 말하자면 당신의 삶 가운데에서 지옥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이러한 말씀이 온 것이지?라고 묻는다. 이는 몇 년 전, 또는 몇 달 전, 심지어 몇 주 전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마음에 임하였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당신은 주의 말씀이 당신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계셨다. 이제 질문은 당신이 그 칼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칼이 찌르려는 것과 함께 멸망하겠는가?

 

당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과거의 당신의 관점과 지금의 당신의 관점을 비교하라. 과거에 그토록 거부했던 관점을 지금은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바뀌게 되었는가? 당신이 정직하다면 당신 스스로 의식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 55:1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신은 사람들이 말씀을 싫어하던 거절하던 아니면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던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뿌리졌으면 조만간에 그 말씀의 효과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가장 큰 함정은 우리가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누구에게 인정받도록 힘써야 하는가? 사람들인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다. 나는 주님의 참된 종들 중에 다른 사람들이 항상 인정하는 말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을 위한 일꾼으로서의 당신의 삶에는 언제나 당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접하게 된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에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알려주면 그들은 나는 동의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때 논쟁을 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냥 남겨 두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실수를 발견하도록 두라. 삶을 흔드는 위기가 찾아오면 자신들을 붙들어주던 과거의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가? 하나님에 의한 파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파괴되어야 하는 것들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칼을 드신 분의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 어떤 교리의 심오함은 그 교리가 죄에 대해 그리고 죄의 치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나는 죄는 교정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파괴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만일 죄를 단지 교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면 성경의 상징은 채찍이어야지 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이기 위한 상징을 사용하신다. 죄란 죽여야 하는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아니하는 사상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죄를 점점 덜 지을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에 빠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결코 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매일 자라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파괴적인 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또한 우리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막는 것들로부터 구원 받았음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죄에 대한 관점은 항상 구원에 관한 견해와 연관된다. 오늘날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견해들이 슬며시 교회에 기어들어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죄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지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자유를 위해서는 죄와 관련된 것들은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것처럼, 죄로부터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2) 구원의 방향 요소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가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연구해보면 놀라운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 모임 중에서 가라는 단어와 주세요라는 단어 중 무엇을 더 많이 사용하는가? 우리는 주세요라는 단어를 더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라를 강조한다. 만일 칼날을 피하였으면 가라!

 

(1) 죄의 마비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노예는 갑자기 자유가 주어질 때 종종 과거로 돌아가기를 더 선호한다.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주어진 자유로 무엇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청했다. 전에 자유를 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청원한 노예들이 많다. 이러한 마비 현상은 갑자기 구원을 받았을 때도 나타난다. 죄인이 죄로부터 처음으로 구원 받으면 이러한 마비 현상의 순간들을 겪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장 자신들을 유혹이 전혀 없는 천국 같은 곳으로 데려가길 바란다. 말로 노골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암암리에 그렇게 원한다. 그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심을 믿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채우심도 믿고. 만일 하나님이 나를 천국 같은 곳으로 직접 데려가시면 참 좋을텐데.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러운 입을 가진 자들 사이에 여전히 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 내가 어떻게 계속적으로 죄에 물들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미래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줘. 사탄은 이러한 마비의 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많은 복음 초청 집회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 바로 이 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도록 배운다. 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경이 주는 조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증거하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 사람들이 이러한 방향을 알지 못할 때 다시 침륜에 빠지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방향성이 바르게 제시된 적이 거의 없다. 그 방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라는 것이다.

 

(2) 구원 받은 자의 고통 

오랫동안 절이던 수족이 풀리면 그 순간에 지독한 고통을 경험한다. 이 고통은 생명이 있다는 표시다. 하나님의 진리를 맨 처음에 깨닫게 되면 보통 환희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삶은 기쁨과 행복과 밝음으로 차고 넘친다. 아무런 고통이 없고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기쁨만 있다. 그러나 가라는 말씀에 따르기 시작하면 구원의 성장의 아픔(growing pain)을 겪기 시작한다. 이때 사탄이 광명한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다가와서 그만 가라. 이제 멈춰라 라고 말한다. 심지어 찬송의 언어로 이렇게 속삭인다. 고통을 피하고 영원한 지복만 누리세!

 

우리는 영적으로 행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 받기 전까지 죄에 속박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6:19). , 우리의 지체를 다르게 사용하라는 말이다. 글만 쓰던 어떤 사람이 대장장이가 되었다고 하자.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느라 한동안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연습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일에 조정된 근육이 만들어진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떻게 행하는지를 계속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아프다고 짜증내며 불평한다. 하나님께서 영적 유아 상태에서 끝없이 짜증만 내를 우리를 구원하시길 바란다. 똑같은 것만 계속 가르쳐 주세요.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하지 마세요. 쉬운 복음만 알려 주세요. 즉 항상 믿어온 것은 믿겠지만 전에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은 고통스러우니까 가르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비교, 5:12).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부탁을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심을 감사하자. 그 성장의 고통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3) 구원하는 열정  

우리 주님께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18:31)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가만히 서 있는 열정이 아니라 나아가는 열정을 의미한다. 짧던 길던 은혜 가운데 있었던 당신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자.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어떤 기간에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알게 되었는지 질문해 보라.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번영할 때였는가? 절대 그럴 리 없다! 어려움의 때, 긴장의 때, 갑작스런 사고의 때이다. 그 기간은 이 땅에서의 과거의 삶의 한계를 느끼고 가라는 열정을 배우는 때이다. 자연 세계 속에서의 큰 재난은 - 가령, 죽음, , 사별 등 - 그 사람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안락한 삶만 산다면 어두움에 감춰진 보화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구원이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실 처음으로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기 시작한다. 성령의 열정이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이를 모르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 1:3)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이 성경에 신경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싶지 않아. 끌리지가 않아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성령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애착을 느끼지 않는 주제들을 직면하게 하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3) 구원에 있어서 훈련의 요소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 땅에서라도 주님을 향한 기억은 당신을 충분히 강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셨던 말씀을 주목해보자.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22:19).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가신 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곳에 계신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1) 위험한 안심 (Infatuation) 

안심은 스스로 안정감을 느끼는 어리석은 느낌을 말한다. 종종 병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는 위험한 안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위험이 있다. 번연은 이를 홀리는 땅(the enchanted ground)이라고 불렀다 (비교, 벧후 2:12-13). 우리에게 그래, 지금 모든 것이 다 좋아. 이곳에서 쉴 수 있겠어라고 안심할 때마다 사실 위험에 처하여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주님 안이다. 구원의 체험, 거룩의 체험이 있다고 하여 안심해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 그분 안에서만 안심하라. 다른 곳에서 안심을 느끼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안심입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분명히 사탄에게 패하게 될 것이다.

 

(2) 신적인 명령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생각하라는 명령은 단지 기억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주님과 당신 자신을 다시 일치시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명령에 소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큰 위험에 빠진다.

 

< 장애물들과 난관들이 마치 감옥의 벽과 같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누워 잠이 드네. >

 

이런 자세는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단계이다. 이러한 영적 질병이 몰래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신체적 피곤은 계속 느껴지지만 영적은 피곤은 그렇지 않다. 영적 피곤의 증상은 이렇다. 은혜가 넘치지 않더라도 전에 한번 받은 은혜로 계속 버티자.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라서 이 정도야 봐 주시겠지. 과거에 주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으니 지금은 쉬어도 괜찮겠지.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음이 확실하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10:10).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지 게으르고 안일에 빠지라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영적 게으름에 빠질 때마다 주저 앉거나 멈춰서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 영적으로 메마르는 위험에 처할 때 마다 또는 궤도를 벗어나 홀리는 땅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사 삶의 지진을 허락하심으로 모든 것이 박살나고 당신도 무너지게 하셨다. 당신은 한동안 당황하고 놀랐지만 갑자기 주께서 당신을 일으키신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13:14).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뜻한다.

 

(3) 헌신된 지성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오도록 하는가? 정원을 내버려 두면 정원은 잡초로 무성하여지더니 폐허가 된다. 성도의 마음도 내버려 두면 곧 사탄의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쓰레기 봉지가 될 것이다. 성도가 자기의 마음을 돌보지 않을 때 어떤 것들이 그 곳에서 자라나는지 바울의 글을 읽어보라. 예를 들어,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다 (참조, 3:5).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는 명령은 우리가 받는 지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의 지성을 한가지 목적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이다. ,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예루살렘에 합당한 것들만 받아 들여야 한다.

 

“… 두라. 이것은 명령이다. 따라서 당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관리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생각들만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밤마다 잊지 말고 기도하라. 악에서 구하옵소서 ( 6:13). 간절히 드리는 이 기도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꿈마저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는 자세이다. 주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출처] 3. 구원|작성자 스데반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