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2.3 감쪽같이 속인 사탄의 최초의 함정, (영적인 순종을 뒤엎으려는 속셈)

새벽지기1 2017. 9. 8. 06:59


2) 감쪽같이 속인 사탄의 최초의 함정

 

(창세기 3:6-7)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사탄은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 하와와 아담은 사탄이 누구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탄은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의도를 감쪽같이 숨기고 최초의 함정을 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a son of God)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을 통하여 발달되게 하셨다.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연적이었다. 순종은 아담 자신의 계속적인 도덕적 선택으로 가능하였다. (역자 주 - 챔버스가 도덕적 선택(moral choices)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인간의 인격인 지..의의 자유의지를 통해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은 바로 이 부분에 최초의 덫을 놓았는데 자신의 의도를 감쪽같이 속였다.

 

(1) 자연적인 관심에 의하여 오염된 영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3:6).

 

이 구절은 사탄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사탄은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와는 인간의 영혼이 자연의 생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와는 뱀(사탄)을 수상하게 여기거나 의심하는 대신 친근감과 호기심을 보여주었다. 처음의 죄를 보면 죄의 속성 및 죄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양으로 말하셨다. 양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의도가 없다. 그들은 단지 방황한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러한 예를 사용하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양들처럼 방황하지만 어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사탄은 맨처음에 사람들을 어리석고 멍청한 양들처럼 취급하여 감쪽 같은 덫을 놓는다. 사탄의 속이는 방법은 아직까지 바뀐 적이 없다. 그리고 그의 방법은 하나님의 책에 분명하게 적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적인 관심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오염될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한다.

 

(2) 자연적인 친밀감에 의하여 덫에 빠진 영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3:6).

 

우리는 이 구절에서 두 개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원하는 물질을 향한 친근감이고 둘째는 가장 가까운 살아있는 관계다. 하와는 과일이 맛있다는 것을 알자 남편을 데려왔다. 혼자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브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길, 사탄이 그녀를 속였다고 하는데 이 뜻은 하와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분명한 이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속은 것이 아니다 (딤전 2:14). 그는 알면서 그 과일을 먹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면서 행한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죄다.

 

(3) 자연적인 영향에 의하여 죄를 지은 영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3:7).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연적 삶을 영적인 삶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자연적인 삶은 도덕적(moral)이거나 부도덕적(immoral)이지 않다. 우리 몸은 도덕적이지도, 부도덕적이지도 않다. 우리 주님도 몸을 갖고 계셨다. 주님은 배가 고프셨다. 배가 고픈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만일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실 때 음식을 드셨다면 이는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이었기에 죄가 되었을 것이다. 몸이 죄가 아니며 자연적인 식욕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를 희생하기를 거부하면 죄가 된다. 사탄의 맨처음의 전초 기지는 순진한 자연적 영역이다. 우리는 잠깐 이곳에 정을 붙이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요. 호기심이 나서 그러는데 뭐가 문제겠어요라고 말한다. 성경이 베일을 거두고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탄의 유혹은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영적인 순종을 뒤엎으려는 속셈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사탄은 자신의 속셈을 속이는데 성공하였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와는 사탄이 무엇을 하는지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과정이 어떠하던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그 순간에 죄에 대한 책임을 핑계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때마다 그 즉시 사탄의 첫째 함정은 성공하게 된다. 또한 첫째 함정에 빠지면 그 나머지 함정에 빠지는 것은 매우 쉽다. 한번 하나님의 뜻에 자연적인 삶을 희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원칙이 되면 그 나머지는 전부 주의 뜻을 쉽게 거부한다.

 

(1) 가장 깊은 곳에 의심이 들어옴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3:1).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가장 깊은 내면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이다. 제일 먼저 무너지는 곳은 마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속성 안에는 불치의 병이 있는데 그 병은 하나님을 향한 의심의 병이라고 계시한다. 그 의심의 병의 기원이 성경 안에 설명되어 있다. 그 기원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였던 두 존재에게 있는데, 하나는 사탄이 된 천사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관계를 맺은 아담이다. 이 기원은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보이는 물질 세계에서 단지 뛰어난 동물로서 산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황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고 가르쳤기에 성경을 귀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거룩하게 여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계를 체험할 때, 외부에서 벗어나 내면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도 그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다. 자연적인 삶의 마지막 지점에 닿게 되면 우리는 자연적인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경이 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라는 불치병을 다룬다. 이 의심의 병 배후에는 엄청난 초자연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병은 속죄(Atonement)가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 바울은 그 병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병을 육신(the carnal mind)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치유될 수 있겠다. 바울은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 8:7)라고 말한다. 모든 죄의 절정은 하나님을 향한 의식적이며 피 묻은 반역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아담의 죄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의식적인 반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란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모든 죄의 절정이라기 보다는 모든 죄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짓는 죄악은 그가 어떠한 죄를 짓던 첫번째 죄악의 특징을 지닌다. , 첫번째 죄와 같은 원칙 및 성향을 띄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참으로 말하셨는가?라는 의심이다. 만일 이 의심을 받아들이면 그 영혼은 완전하게 황폐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은 마치 둑에 틈이 생긴 것과 같다. 둑이 부서지면 그 물살을 막을 길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한 비방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지식 속에 그리고 가장 깊은 내면에 하나님을 의심하는 첫째 죄가 들어온 이후 그 성향이 인류를 통하여 계속 내려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은 순전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위험하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시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7:21)라고 하셨다. 그러나 당신은 말도 안됩니다. 내 마음에는 그러한 더러운 것들이 없습니다. 나는 순전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날 주어진 상황은 당신의 순전함이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오직 사람의 마음에 관하여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완벽한 진리임을 깨닫게 한다.

 

(2) 내면 속에 존재하는 거부할 수 없는 육욕 (Sensuality)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3:5).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 공의에 대한 의심이 인간의 마음 속에 일단 들어오면 육욕의 수문이 활짝 열기게 된다. 육욕(Sensuality)이라는 뜻은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해보려고 주변의 자연적인 것들을 이기적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는 육욕이라는 단어를 아주 무섭고 끔찍한 죄악들을 의미할 때 사용하지만, 그 뜻은 훨씬 크다. 육욕은 가벼운 구름처럼 품위있게 세련될 수 있다. 또한 육욕은 영적이면서도 지독히 감각적일 수 있다. 육욕은 지독한 영적 교만 가운데 내 한가지 소원은 착한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소망은 구원받아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 또한 육욕이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들어오면 육욕의 범람은 끝이 없다. 성경은 정욕(Lust)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우리는 정욕이라는 단어를 육체의 더러운 죄악을 말할 때 사용하지만 성경은 그 이상의 뜻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지 그것을 당장 가져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신체적인 욕구일 수 있고 영적인 욕구일 수 있다. 정욕이 가진 원칙은 당장 그것을 원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다. 하나님은 너무 무관심하다라는 것이다. 정욕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한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주목하라. 주님은 언제나 죄의 성향을 대면하셨다. 주님은 결코 사람들을 외적 행위로만 평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인간들의 부도덕 및 사람들의 육체의 죄악으로 인하여 당황하신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러한 죄악을 전혀 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젊잖은 교만을 더욱 심각하게 다루셨다. 이러한 젊잖은 교만의 삶은 자신을 지배하는 성향에 모든 외부 상황이 잘 조화가 되도록 지혜롭게 약삭빠르게 행동한다.

 

(soul)이란 단지 사람의 영이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어린아이의 영은 거의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혼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성경에서 은 거의 언제나 육체적 속성과 연결된다. 육체를 통해 사람의 진짜 영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후에 나타나신다 (고에쓰 -Goethe). 이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마지막 순간에만 나타나신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만 산다면 성경은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 자체가 역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사람의 정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죄에 대해서는 오직 성경의 설명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성경과 상관없이 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불쌍해 보일 따름이다.

 

(3) 개별성(the individual)의 사악한 굴복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 3:7).

 

사악한(Iniquitous)이라는 의미는 왜곡된 불의 또는 불평등을 뜻한다. 개별적(individual)이라는 의미는 인격이 분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제일 먼저 의심이고 그 다음은 육욕이며 마지막으로 파멸이 드러난다. 죄가 초자연적인 악의 창시자와 함께 근본적으로 비틀어진 것이라면, 구원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창조주와 다시 잘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원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기껏해야 사탄이 한 일을 맞먹는 정도라면 그분의 이름은 구세주가 아니라 문화라고 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에게 주님의 계시된 속성에 대해 누차 언급하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1:21). 구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관점들, 사람들의 공감을 사려는 표류하는 관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수 있는 일은 고작 어떤 원칙에 상응하는 또다른 원칙 정도를 제안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관점은 한계에 달한 사람에게 그 한계로 인해 하나님을 모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결과는 언제나 죄에 대한 잘못된 엉터리 관점에서 온다. 만일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이 여러 원칙 중에 또 다른 원칙 하나를 제안하는 것이라면 주님을 구세주라고 부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죄의 실체를 직면했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그른 관점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 조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단지 교육 예찬이며 문화 및 여러 인간적 방침들이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성경과 인간의 체험은 구원 및 죄를 근본적인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직 당신의 유전형질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셨다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에 의하여 당신의 유전형질을 바꾸실 수 있다. 이 진리만이 죄에 대한 바른 관점이요 바른 생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를 다루기 위함이지 인간들의 여러 작은 실수들을 대처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실수를 대처할 수 있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유전 형질을 주시기 위함이다. , 주님 자신의 속성을 그들에게 친히 심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은 사람의 영혼 가운데 있는 사탄의 능력을 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멸절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키시면,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나타나는 삶에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 당신은 여전히 전과 같은 몸과 전과 같은 몸의 자연적 욕구들, 또한 전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당신의 지체들은 과거에 죄의 종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본이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희생하셨다. 당신도 성도로서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지성을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셨다. 당신도 성도로서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셨다. 당신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사탄이 아담을 만났던 것과 똑같이 자신을 변장하고 우리 주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끄셔서 사탄과 맞부딪히게 하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참조, 4:4-11). 사탄은 처음의 의심을 집어 넣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먹혀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의심하기를 거절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였다. , 주님은 자신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삶으로 변형시키셨다. 우리는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해야 한다.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주님의 뜻에 희생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