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2.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양심에 진실함)

새벽지기1 2017. 9. 6. 10:00


2) 양심에 진실함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한 그 심오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히브리 기자는 양심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9:14).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에 있어서 양심은 마땅한 자리에 있는가? 병적으로 양심에 예민한 사람들(Hyperconscientious people)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다. 아닙니다. 제가 이 사람에게 잘못했으니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잘못한 후에 고통스러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해준 것은 다 맞지요. 그러나 내 자신이 너무 비열하고 악하기에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내가 책임져야 해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들이 매우 고결한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일은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어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그 참혹한 죽음이 내게 마땅합니다. 주님, 그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죄요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이 자리에 임할 때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양심을 씻는다. 그후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놀라운 자유함이 깃든다.

 

양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보다는 잘못된 관계. 거듭난 이후에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가만히 앉아서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다 지난 일인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는가! 라고 말해야 하는가?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바꾸실 수 있다! 우리는 사과를 하고 편지를 써서 나름대로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보이는 삶 뒤에 가려진 지옥과 같은 비극들을 들춰내시기 시작하신다. 그러면 속죄함을 받았으니 과거를 생각할 필요 조차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양심이 살면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풀리지 않은 관계의 부분이 정확하게 우리의 신경이 마비되는 곳이요 사탄의 굴레가 역사하는 곳이다. 삶의 여정을 보면 깨어진 친구 관계가 이곳 저곳에 즐비하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관계들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이러한 비틀린 삶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시기 시작하면 신기한 부담이 생긴다. 어떻게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오셨는지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 예민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하여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이 땅의 많은 정신병 환자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면 그들의 문제는 치유된다. , 우리가 저질러 놓은 피해가 모든 사람을 속죄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효력을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효력이 우리 안에서 선물로 나타나게 할 뿐만 아니라 관계 회복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게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은 마침내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놓으신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 2:25).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심을 씻기시는가! 주님은 죄의 권능 및 죄로 인한 손상에서 자유케 할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망가진 마음과 생각을 온전케 하신다. 죽은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심을 다른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간이점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과거의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중보기도를 드리게 된다 ( 8:26-27).

 

죽은 행실에서

 

죽은 행실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는 모든 행실이 죽은 행실이다. 모든 기도, 모든 가르침, 모든 증거, 심지어 희생적인 행위마저 하나님이 없이 행하여지는 것이라면 생명을 막는 죽은 행실이다. 잠시라도 당신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말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면 주의 자비가 임하길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우리의 생명을 숨막히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 성도의 저주는 그의 잘남인 것을 깨닫는가! 아무 것도 붙들지 말고 흐르게 두라. 오직 십자가에 진실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행실로부터 당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 하라. 많은 성도들이 성결하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덕에 대하여 오해한다. 자연적인 덕은 우리가 바라보는 약속들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에게 타락 이후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들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인내, 정직, 양심등을 귀하게 여기지만 우리는 하늘 위나 땅 아래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성 및 고상한 영적 자원들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한다. 이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제 내 손에는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당장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말한 체험을 얻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 이후로 우리가 다시 세우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모든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셨음을 증명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뜻은 예수님을 위하여 내려 놓은 삶을 말한다. 예수님을 위하여 좁은 길을 걷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의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 갑자기 달아오르는 열광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목적을 향해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삶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영혼을 얻으려는 목적으로서 이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이다. 이는 영혼을 향한 열정이 아니다. 이보다 더 무한하게 심오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성령의 열정이다.

 

영혼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진 섬김에 지나친 인간적 정이 스며드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님의 요청이 아닌 인간적 요청 때문에 이러한 섬김의 삶이 장애를 받는 경우도 많다. , 인간들 간의 뜨거운 열정적인 사랑이 장애물이 되는 경우다. 이러할 경우 그 모든 섬김은 철저한 낭비가 된다. ,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낭비되는 섬김들! 그렇게 슬피우는 고통과 자기 연민, 그리고 기회를 놓친 후의 애통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애통으로 주의 생애를 한 순간도 낭비하신 적이 없다. 우리가 무엇으로 애통하는가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숨어있는지가 보인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사회적 양심이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죄악을 보며 충격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양심이 있다. 자신이 믿는 신조와 부딪히는 것을 만나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양심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항하는 것들에 대해 놀랍도록 예민하게 된다.

 

나는 모든 영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무 계산도 하지 말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당신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내려 놓으면 절대로 슬플 수 없다. 당신의 구원과 거룩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주님께서 당신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심을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취하여 주의 죽음과 일치시키도록 하라.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십자가 밑의 그 빛만 있게 하라. 당신의 생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지게 하라.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2-구속에-대한-교육적-통찰-죄의-철학-2-양심에-진실함 [목양연가(牧羊戀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