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5. 심판

새벽지기1 2017. 9. 15. 07:04
5. 심판

 

,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침몰하였네. 하나님만이 아시네.

그러나 침몰을 하는 순간 완전히 침몰한 것은 아니네.

 

비록 흔치 않지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

우리는 참된 영혼의 선물을 받게 되네.

참된 영혼의 선물은 뚜렷하게 거짓 것과 구별된다네.

 무엇이 잘못인가를 보네.

 

옳은 길 또는 그른 길

무엇을 추구하던지,

승리 또는 멸망으로 향하게 될 걸세.

 

-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ing)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건강하려면 비전 가운데 허락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체험이던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어떤 근본적인 진리, 곧 속죄, 성령, 죄 등등에 대한 진리의 비전을 갖고 있다. 만일 그들이 비전을 잃으면 그들의 영혼은 위험에 처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결단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항상 젖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비전을 붙들려고 하지 않는 점이다. 그들은 희미하게 비전을 보지만 붙들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 26:19)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받은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살았던 것이다.

 

진리의 비전을 보았지만 그 비전을 붙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가장 슬프다. 이들에게 심판이 임한다. 이는 지적 분별의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그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그 비전을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문제이다. 당신이 받은 비전과 관련된 위대한 진리에 계속 빠져들라. 잠이 들 때도 그 진리의 비전을 생각하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그 비전을 생각하라. 당신의 모든 생각이 그 비전의 포로가 되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특별한 그 진리와 관련한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비전을 주시며 그 비전을 붙든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1) 위기의 주요 의미

 

그 정죄는 이것이니.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사람들은 이리 저리 헤매는 평범한 나날들에 의해 정죄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시험이 온다. 위기는 인생의 흐름을 급하게 바꾼다. 그때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 위기 가운데 사람들은 삶을 돌아본다. 이때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한다. 삶을 지나면서 갑자기 위기가 오고 그 위기를 통하여 심판을 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기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기가 오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산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언제나 중대하여진다.

 

(1) 중대한 이슈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막 6:16).

 

헤롯의 경우 그의 위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파할 때 임하였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막 6:14). 헤롯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번잡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그 위기는 헤롯에게 번민을 주었던 공포가 무엇인지 드러냈다. 헤롯은 사두개인이었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시끄럽게 널리 퍼지자, 그는 미신적인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목을 자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참조, 막 6:14)

 

(2) 죄책감을 주는 생각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18).

 

죄책감을 주는 생각은 헤롯이 요한의 말을 들음으로 발생했다. 요한이 그에게 진리를 말하자 헤롯은 죄책감에 빠졌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막 6:20). 그러나 한 가지만은 거절했다. 헤롯은 빛이 주어졌을 때 빛에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 바로 위기는 헤롯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3) 확인된 의도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막 6:21).

 

기회가 좋은 날은 언제나 온다. 죄를 만족시킬 기회의 날이다. 이는 일반 법칙인데 많은 사역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죄는 만족되던지 그렇지 않으면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목이 졸려 죽어야 한다. 지옥은 모든 죄가 만족되는 곳이다.

 

감상주의는 실체를 접해보지 않은 속성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못하도록 기독교 사역이던 뭐든 끝없이 일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없는 참회와 고해를 보인다. 하지만 당신의 눈에는 여전히 그들의 잘못된 점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점을 보기를 거절하며 당신이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거절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차없이 그 사람의 감상을 벗겨내어 잘못된 그 한가지를 직면하게 해야 한다.

 

모든 위기는 위의 세가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위기는 성품을 드러낼 뿐 성품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신의 성품을 자각하면서 살 수 없다. 성도의 삶의 특징은 근본적인 숨김없는 진실함이다. 위기의 순간 외에는 성품을 온전히 다 의식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입장이라면 이러 저러하게 했을텐데. 그러나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위기의 속성은 당신이 의식할 수 없게 발생하는 것이다. 갑자기 발생한다. 그 때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하느냐가 당신의 성품을 드러낸다. 자신도 놀라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올 때, 가령 사별이나 사업이 실패했거나 병이 들거나 했을 때, 놀랍게도 그 사람은 당신이 생각했던 그러한 사람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당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가장 정이 많고 관용이 많다. 위기를 통하여 당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그 사람의 속성이 드러난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위기를 겪자 당신 및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그 사람은 가장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이 위기는 사람을 정확히 심판한다.

 

2) 가장 위대한 도덕적 기준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세상에 온 빛이 그 기준이라고 하신다. 누가 세상의 빛이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인자)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을 위해서는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하며 공의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치우치거나 정에 빠지면 안 된다. - 아미엘>

 

잠깐 깊게 생각해보면 최고의 성도들까지 객관적인 심판의 기준으로 인도하셔야 하는 성령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려는 생각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잠재하여 있다. , 그래.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헌신하며 충성한 것을 잘 아실거야. 그러나 최근에 너무 힘든 일이 많았어. 내게 있어야 할 행운들이 없었어.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러한 모든 자세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적용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나는 빛에 순종하는가? 사적인 이해가 주님의 기준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 이는 모든 죄로부터 계속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요일 1:7).

 

(1) 이방인을 위한 심판 기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참조, 마 25:31-46; 롬 2:11-16).

 

이 기준에 대해 나오는 가장 첫번째의 질문은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참조로 주어진 구절들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언급한다. 곧 그들이 참 빛을 본적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에 의하여 심판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접하기까지는 양심에 의하여 심판 받는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자들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자들은 영원히 지옥 불에 갈 것이라는 광포한 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2) 기독교 국가를 위한 심판 기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기독교 국가의 심판 기준은 받은 빛이 아니라 받아만 했어야 하는 빛이다. 기독교 국가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각 영혼이 멸망을 향하게 되는 시작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거절하는 때부터이다. 또는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때부터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주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나라들에 대한 심판 기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심판 기준은 우리 주님이시다.

 

(3) 교회를 위한 심판 기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1-13).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 각 개인들의 삶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적 삶에 관한 것이다. 각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이 없이 개인적으로 온전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주셨으니. 어떤 목적으로 주셨는가? 그들이 얼마나 영리한가를 보이기 위함인가? 그들이 받은 은사를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은사들 하나 하나가 항상 그 목적에 의해 제약을 받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다고 하는데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성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데로 있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으면 완전할 수 없다. 자신들을 붙든 목적을 강하게 붙들려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 자리에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데 방해가 된다.

 

3)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선택을 하면 영원히 바꿀 수 없다.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운명을 정한다. 어떠한 느낌을 가졌었는지 감동을 받았는지 영감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위기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가 중요하다. 이 결정이 우리를 세우기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 조만간 모든 인생에 질문이 올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리신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기로 결정합니까? 만일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던지 또는 나중에 결정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도 결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1) 어두움을 향한 선입견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6:23).

 

위기가 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사람 외에 그 사람의 성향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변하지 않은 자연적 성향을 우리 주님은 어두움이라고 부르셨다. 이는 빛에 대항하는 선입견을 의미한다.

 

(2) 고집스런 방향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막 6:26-27).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었다. 헤롯은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계속되는 죄악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의 양심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증거하신 모든 것이 그에게 농담이 되었다. 누가복음 23:8-9절을 보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헤롯이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하도록 명령하자 그렇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삶은 타락으로 달렸다. 그의 삶은 보기에 무섭도록 잘 풀리는 것 같았어도 그의 마음은 죽어 있었다. 헤롯이 닿은 이 상태가 더 이상 선과 순결과 공의를 믿지 않는 끔찍한 상태이다. 성경은 이 자리까지 이른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죄를 덮으려는 위험에 처한 자를 보면 아무리 아프고 그 영혼이 당신을 귀찮게 할지라도 그 죄가 제거될 때까지 분명하게 하라. 그 죄를 두둔하거나 동정하지 말라. 오늘날 참으로 부족한 것은 개인적으로 또한 교회적으로 많은 죄악들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덮여지고 있지만 이에 대항하는 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3) 운명을 선포함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 23:9).

 

주님께서 아무 것도 대답지 아니하신 이유는 마가복음 6:26-27절에 나온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헤롯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앞에 섰으나 그분에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양심의 가책도 더 이상 없다. 사람이 헤롯처럼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라는 인생의 결정을 내리면 그 영혼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는 것은 삶 속에서 저주의 시작이다. 그리고 영원한 저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삼상 28:15). 하나님이 더 이상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으시는 상태는 그의 삶에 저주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빛으로 나아오기를 거부하고 그 빛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궁극적인 운명이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그 빛에 사로 잡히지 못한 영적인 삶은 가장 비참하다. 빛이 주어진 때는 밤일수도 있고 낮일수도 있다. 유아 시절일수도 있고 신앙 생활 초기일 수도 있다. 심지어 생생히 기억나는 지난 주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당신만이 그때가 언제인지 알겠지만, 이는 당신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 빛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라고 하겠는가? 어떤 근본적인 문제와 함께 어떤 빛이 당신에게 주어질 때마다 그 빛을 거절한다면 당신의 멸망은 분명하다. 하나님에 의해 강한 진리의 분명한 비전이 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임하였는데, 그럼에도 다른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그 비전은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왕자요 공주여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지어 거룩하게 된 자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단계에서 주님과 더 이상 동행하기를 거절하더니 남겨진다. 하늘의 비전을 순종하는 대신에 형편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취하는 자연스럽고 영리한 결정을 내린다. 이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결정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놓치는 결정들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즉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택함을 입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비전이 올 때, 간절히 부탁하는데, 그 비전에 불순종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직 한가지 목적만이 있는데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죄의-철학-5-심판 [목양연가(牧羊戀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