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죄의 철학

[죄의 철학]- 8. 양심

새벽지기1 2017. 9. 26. 07:12

8. 양심

 

양심은 인간의 영혼 안에 내재하는 기능으로서 그가 무신론자이던 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아는 최고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는 최고는 하나님이다. 무신론자가 아는 최고는 자신의 원칙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은 엉터리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만일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그 음성은 모든 사람 안에서 똑같아야 한다. 바울은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 26:9)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의 양심에 따라 행했다. 우리 주님은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순종하기 위해 당신을 죽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눈을 단지 기록만 할 뿐미여 그 기록은 그 기록을 보는 빛에 따른다. 양심은 영혼의 눈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배운 것에 기초하여 밖을 본다. 양심이 어떻게 기록하는지는 하나님의 대해 어떤 빛이 비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 비치는 유일한 참된 빛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는 새로운 양심을 얻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해 비치는 완전히 새로운 빛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빛에 따라 양심이 기록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 그 결과로 죄의 책망을 철저하게 느끼며 당황하게 된다.

 

1) 양심의 조항들(the articles)

 

양심의 조항들이란 창조주의 손으로 사람 안에 새로워진 양심의 규칙들을 의미한다. 그 조항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염두하라.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나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아담 같은 존재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복이지만, 아담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우리들에게는 그 사랑은 정말로 지옥의 고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시며 가까우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순진무구한 관계를 가진 처음 사람 아담에게는 순수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분을 아는 것이 지독한 공포가 되었다. 하나님은 주님 자신처럼 사람을 순결하게 정결하게 하실 때까지는 결코 사람을 결코 떠나실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의 규칙들은 거듭난 영혼 뿐만 아니라 타락한 영혼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양심의 태도들

 

하나님이 사랑, 거룩, 가까우신 분으로 계시될 때 사람의 양심은 죽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그 계시는 사람에게 평화의 삶이 아니라 지옥을 가져다 준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10:34).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곳마다 주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러면 사람은 주님 앞에서 두려워 떤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리에 다른 것을 두려고 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 깜짝 놀랄 순결함 가운데 자신에게 가까이 오심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고 싶은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그 순간 양심은 하나님은 거룩하며 거룩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따라서 주님의 실재하심은 죄인에게 고통을 준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15:22).

 

(1) 자아-의식 

양심이 하는 첫째 일은 자아-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인데 이때 당황스러움이 발생한다. 어린 아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자아-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모든 부자연스런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깨어나게 되면 자아 의식이 생기면서 마치 박쥐가 빛을 피해 도망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양심이 무슨 일에 성공시키는지 잘 모르고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너무나 가볍게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된 양심의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일초라도 서 보라. 당신은 그 즉시 창세기 3:7절의 언급된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 3:7). , 당신은 짐승과 유사할 뿐 하나님의 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 세상-의식 

양심의 빛에 의해 가책을 느끼면 우리는 외부의 여러 시끌법썩한 것으로 달려간다. 기독교 초기 시절에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마음을 앓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심리학자들이 우리에게 더 건강한 방법은 죄에 대하여 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방법으로는 세상 일에 바쁘게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 일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특징이다. 쉽게 살라. 건강한 몸을 유지하라. 절대로 양심을 불편하지 않게 하라. 어떻게 하든 종교적 만남을 피하라. 우리 앞에 병적인 추세의 사건들을 가져오지 말라. 이 표현에서 병적인 추세의 사건들이란 성령의 책망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식 

우리 자신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세상 일에 관심을 갖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모든 논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온다. 은연중에 하나님을 느끼게 되면서 우리의 평강은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형성하실 때 넣어 두신 기본적 바탕 요소들을 내어 버리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것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 만일 거룩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함께 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고통 밖에 없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해 깨어나면 우리는 간교한 위선자가 되거나 또는 성도가 된다. 하나님의 율법이 양심을 통해 역사하면 우리는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곳으로 가게 된다. 또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 때문에 우리의 종교적 자세에 변화가 생긴다. 하나님이 계시면 불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할 수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지 한다.

 

3) 깨어난 양심

 

(1) 죄로 무장된 양심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다. 우리 주님은 이 사실을 설명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 11:21-22). 이 세상 신이 다스리면 사람들은 죄로 자신을 무장하게 된다. 이 말은 반드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 악한 자세를 취하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더 이상 죄로 인한 불편함이나 혼동이나 당황함이 없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 73:4-7).

 

(2) 죄 가운데 깨어남 

그러면 양심은 어떻게 깨어나게 되는가? 사람이 사람의 양심을 깨울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깨우실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강한 사람은 더 강한 사람과 전쟁을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11:22)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죄로 무장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시기만 하면, 그의 무장은 제거되고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고통과 아픔과 당황을 체험하게 된다. 전에 그는 이 세상 신의 평화로 무장했었다. 그의 양심은 모든 것이 괜찮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양심은 하나님의 빛 앞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기록한다. 내면의 요새는 쑥대 밭이 되고 평화가 기쁨은 사라지며 그는 소위 죄의 책망 하에 있게 된다.

 

(3) 거룩을 향해 달려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 16:8).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 엉뚱한 것으로 죄의 책망을 하기 쉽다. 죄의 책망을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7:9). 회심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는 죄의 책망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직 궤도에서 벗어남에 대한 책망과 어둠과 고통에 대한 책망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지낸 후 그는 죄에 대한 분석을 쓰기 시작한다. 죄에 대한 감각은 거룩에 대한 감각과 비례한다.


다음 찬송을 정확하게 그 내용이 옳다.

당신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는 자는 자신 안에 가장 악함을 의식하는 자이다.

이 의미는 내재하는 죄와 내재하는 거룩이 함께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재하는 죄는 내재하는 거룩과 결코 함께 거할 수 없다. 이것이 정확하게 바울이 말한 내용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7:18).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고후 1:9). 우리들 대부분은 거룩을 향한 각성 후에 따르는 끔찍한 뼈아픈 고통에 대한 언급없이 거룩에 대한 헛소리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계속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의 진짜 속성은 죄라는 사실을 보게 하신다. 만일 당신이 죄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죄악을 범한 죄인보다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깨달은 성도에게 물으라.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 줄 것이다. 지은 죄악에 볶이는 사람은 그 죄악 때문에 처절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죄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만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인간이 헤어릴 수 없는 저 깊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참조, 요일 1:7). 종종 하나님의 성령은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성도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3). 이 고백을 할 때의 바울은 성숙한 성도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붙잡기 전의 과거의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종종 돌아보고 있었다.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내면의 인식이다. 당신의 하나님의 영을 통해 양심에 의해 죄의 책망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당신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감상적인 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시기에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은 오직 멸망 밖에 없다. 속죄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기 때문에 맘껏 죄를 짓고 맘껏 용서함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여 그를 성도로 변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을 속죄 때문에 하실 수 있게 되셨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당신은 사람들이 증언할 때 그들이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아서 증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의 균형이 깨져서 고통을 받는 것인지 언제나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의 양심 가운데 죄를 책망 받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단지 어린아이 장난 같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죄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면 당신은 가장 큰 원수의 신발의 먼지라도 핥아서 털어주라고 하면 얼마든지 기꺼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죄를 책망 받으면 사람과의 관계는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신의 진정한 고통에 끼지 못한다. 정말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있고, 하나님의 거룩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신다는 생각 가운데 공포로 떤다. 이것이 바로 죄의 책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부분이 오늘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요소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좌의 예수 그리스도의 백열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선의 기준을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사람의 본된 행위를 사람 위에 들어올린다. 그들은 우리에게 동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부담이 사라지면서 자기 의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그러나 성령에 의해 양심이 밝아지면 다음 세가지의 놀라운 조항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라는 사실이 우리의 내면의 생명에 곧바로 깨달아지게 되면서 우리는 공포로 인해 위나 아래나 아무 곳도 바라 볼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하기 시작하면 그의 삶에는 전혀 골찌를 썩힐 필요가 없는 거대한 자유의 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그 사람의 작은 상세한 부분까지 교육시키신다. 신체적 삶의 모든 구부러진 것과 뒤틀려진 부분들, 생각과 감정 등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님께 보고되어진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면에서 흠이 없기를 요구하신다. 이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절대적인 절망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주께서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신 모든 것을 우리를 통해 행하시기 시작하신다.

 

속죄의 놀라움은 바로 이 사실이다. , 완벽하신 구세주께서 그의 완벽함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내가 빛 가운데 거하면 생명의 모든 부분, 즉 몸과 감정과 영적인 모든 부분이 거룩 안에서 흠이 없게 보존될 수 있다. 나의 의무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머지를 다 알아서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또한 이제 그 정도면 너는 다 됐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종종 고통을 만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지만 또한 소멸하는 불”( 12:29)이시기 때문에 계속 우리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실 것이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위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탈 것이 없을 때까지 그래서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만 탈 때까지 계속 태우시고 흔드시고, 흔드시고 태우신다.

 

[출처] 8. 양심|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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