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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와 벽돌집

새벽지기1 2017. 8. 2. 10:22


# 바퀴와 벽돌집

<열하일기>에 보면 사신으로 북경에 가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충격을 먹고, 중국을 엄청 부러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두 가지 - 바퀴와 벽돌집 - 입니다.


중국의 바퀴는 규격화되어 있어서 가령 강남에서 수레에 물건을 싣고 만주까지 온 수레의 바퀴가 고장나도 만주 지역의 수레 전문점에서 얼마든지 쉽게 바퀴를 갈아끼울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박지원에게는 이게 경천동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거대한 사회적 진보, 생산력의 폭발을 보게 된 겁니다.


박지원은 이렇게 충격을 받은 이유도 소개합니다.

당시 조선의 남해안 바닷가에서는 멸치가 지천으로 잡혀도 이걸 다른 곳으로 이송해 팔기 어렵기 때문에 태반을 논밭의 거름으로 뿌린다...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멸치가 귀해 한웅큼에도 서민들은 엄두가 안날 고가에 팔립니다.

이런 조선의 낙후와 비참함을 딱 하나, 바퀴라는 존재를 통해 파악한 겁니다. 도로도, 상거래도, 수레도 없는 조선.

연암 박지원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가 언제인줄 아세요? 바로 1780년입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이미 증기기관이 실용화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세상에나, 그 시대의 최고 지식인이 무려 바퀴를 부러워하는 겁니다.


바퀴가 인류사에 등장한 게 언제쯤이었을까요?

확실한 건 기원전부터 바퀴는 인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19세기를 코앞에 둔 조선에서 그 조선의 최고 지식인이 바퀴를 부러워하는 거에요.

생각해보니 왜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 신랑은 말이나 나귀 타고, 신부는 사람이 양쪽에서 드는 가마를 탔는지 좀 이해가 됩니다. 그냥, 바퀴라는 물건이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았다는 아니 쓰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벽돌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북경도 아니고, 중국 천지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서민주택 벽돌집을 칭찬하느라 박지원 선생 입에 침이 마릅니다.

견고해서 도둑이 들 염려 없고, 비나 바람에 무너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청결하고...

조선시대 우리나라 서민들이 살았던 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가 아니라 70년대까지도 농촌에 남아있었던 초가집들...

흙벽으로 두껍게 올려야 했기 때문에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간단히 말해 건축기술이 그렇게 낙후됐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건축물 중 2층 건물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