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 인해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던 사람이 구원 받고
성령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행실이 변화되었습니다.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다시 한번 깨닫기 바랍니다.
인류의 역사는 BC와 AD로 구분됩니다. BC는 예수님 오시기 이전이고, AD는 예수님오신 후입니다. 역사가 BC와 AD로 나뉘었듯이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과 후로 구분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만약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뚜렷한 변화를 경험하고, 어떤 사람들은 뚜렷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인 신분의 변화를 깨달았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올바르게 볼 때 하나님이 베푸신 지극히 크신 능력, 구원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행실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참 의미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을 잘 나타내줍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 세상 풍속을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2절).
‘그때’와 ‘지금’이라는 단어가 대조적입니다. 2절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전체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인생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이 뚜렷하게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놀라운 신분 변화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 깨달음이 행실의 변화는 물론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내용 중에 핵심문장이 있습니다. 주어는 하나님이고 동사는 ‘살리셨다’, ‘일으키셨다’, ‘하늘에 앉히셨다’입니다. 이것이 핵심문장입니다. 나머지 문장들은 핵심 문장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입니다.
1절부터 7절까지가 한 문장이고, 8절부터 10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1절부터 10절까지의 긴 말씀이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고,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보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핵심요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일으켜 하늘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생명력과 아름다움 지닌 구원
구원은 우리가 죄를 용서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해 주님이 앉아계시는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만큼 친숙한 단어가 없습니다. 친숙해지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친숙해져서 생명력 없는 단어가 되어 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마나 미역 같은 해조류를 보십시오. 바다 속에 있을 때 얼마나 빛깔이 예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햇볕에 말리면 검고 딱딱해집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라는 생명력이 있고 아름다운 단어가 말린 해조류처럼 검고 딱딱해졌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구원
2011년도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던 삼호쥬얼리호 21명의 선원들이 극적으로 구출되었을 때 온 국민들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들의 가족들은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구원은 그렇게 감격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절실한 건지 모릅니다. 질병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제목이겠습니까. 재정적인 위기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재정적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날씨가 좋고 평온할 때 유람선을 탔다면 그 배에 보트가 있다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유람선에서 구명보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탄 유람선이 암초에 걸려 좌초위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찾을 것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한다면 그 약을 어떻게 안 먹겠습니까. 구원은 자신이 처한 형편과 상황이 얼마나 위중하고 위급한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위급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살았으나 영이 죽은 상태
예수님만큼 인간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가혹하게 지적한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잃어버린 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찾지 않으면 들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또 잃어버린 동전과 같다고 했고, 집을 나가서 방황하는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연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원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또한 여러분의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 세상 풍속을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 속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며 육체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1~3절).
1절에서 인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이유로 특이한 표현입니다. 하나는 ‘여러분’이라는 단어는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몸은 살아있으나 영이 죽어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영이 죽은 사람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이 죽은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본성상 영이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해같이 맑은 웃음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실존이요, 성경의 진단입니다. 죽어있다는 표현은 불신자들이 듣기에 매우 거슬리는 표현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생기발랄하게 살고 있는데 죽어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도할 때도 이런 점을 조심을 해야 합니다. 전도할 때 정확한 진실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걸어 다니는 시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여러분, 영이 죽었기에 몸도 죽는 것입니다. 몸이 먼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몸이 죽었기 때문에 영도 죽었다고 생각하는 데 그 반대입니다. 영이 죽은 결과로 몸이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몸의 죽음만을 두려워할 뿐 영이 죽는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허물은 궤도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고, 죄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와 인간의 관계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영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어거스틴이 죄와 인간의 관계를 네 가지 상태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첫째, 타락이전의 상태입니다. 죄가 없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둘째, 타락직후의 상태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만나 의롭게 된 상태입니다. 바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넷째, 약속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다시는 죄가 없고 반역이 없고 어떠한 어둠도 없습니다. 다시는 죄가 찾아올 수도 없고 죄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무언인가를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결단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인간은 무엇인가를 따라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현명한 결단과 지혜로운 결정을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은 무엇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모습을 몇 가지로 요약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의 풍속에 영향을 받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은 세 가지를 따라 삽니다. 여기서 ‘따라’’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따라’의 의미는 영향력을 뜻합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습니다. 시대의 신이 만들어 낸 우상들, 그 우상들의 이면에 있는 사탄들이 사람들을 이 세상의 문화와 풍속을 따라 살게 합니다. 문화는 호흡하는 공기와 같아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완전히 단절되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화에 역행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따라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풍속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의 역사가 이 세대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
사탄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사탄은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불순종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합니다. 불순종은 불신앙보다 강력합니다. 불신앙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사탄이 역사하는 이유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과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정욕은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풍속, 불순종, 정욕을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은 이 시대의 악한 풍속을 만들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어느 누구도 시대의 풍속과 죄악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를 따라 살면 결론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을 사망의 자녀들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자녀라는 표현은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진노의 자녀는 진노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다릅니다. 우리의 분노에는 죄가 들어있습니다. 변덕스럽고 감정적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인격적이고, 의롭습니다. 인간의 분노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언제 화를 낼지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도 모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단어를 썼습니다. 그 중하나가 먹구름이라는 단어입니다. 먹구름이 비가 올 것을 예측하게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신분의 변화 깨달을 때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4~7절).
인간의 현재 상태와 구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미래에 부활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로마서의 표현을 바꿔서 우리는 과거에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는 것도 이미 과거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늘에 앉힘을 받는 것도 과거에 이뤄진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장차 일어날 일들을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늘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신분의 변화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행실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인생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와 값싼 은혜
“여러분은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8~10절).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은혜의 또 다른 말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라는 말 때문에 값없이 주어진 구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용서했고, 구원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짜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값없이 받았다고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값없다는 말은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와 값싼 은혜는 다릅니다. 값없이 받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구원, 언제든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값비싼 은혜를 거저 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에게서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열매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은혜로 받는 구원을 설명하지만 행함으로 시작해서 행함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어떤 행함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 풍속을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이제 구원 받은 자로 성령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행함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행실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감격하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목적대로 삶에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순종 (에베소서 5:22-23) (0) | 2017.07.28 |
---|---|
세월을 아끼십시오. (에베소서 5:15-21) (0) | 2017.07.26 |
그리스도, 우리의 화평 (에베소서 2:11-22) (0) | 2017.07.22 |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1-13) (0) | 2017.07.21 |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소서 (에베소서 3장 14~21) (0) | 2017.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