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온전히 계실 때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와 깊이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에까지 충만해 집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바울의 두 번째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신이 그 비밀을 전하게 된 것을 감격스럽게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기록한 직후에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면 자랄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얻은 교훈은 중보기도입니다. 바울은 중보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른 성도들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보면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주신 이후에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스펄전 목사는 에베소서 3장을 ‘완전한 하나의 예배’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있고, 기도가 있고, 송영이 있는 하나의 완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중보기도와 송영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아버지 앞에 내가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14~15절).
이 기도를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된 사역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어려운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통해 신앙고백을 하고 그 이후에 성령님의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족속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고백하고 부르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는 아버지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3장에서는 보다 시각을 넓혀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갇힌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라는 표현에서 족속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모두 한 아버지에서 나온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도, 땅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가족입니다. 아더 피크 목사는 이것을 일종의 탄원이라고 했습니다. 탄원을 한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족속의 아버지인데 누구는 선택을 받아 은혜를 누리고. 누군가는 은혜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탄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의 아버지입니다.
“눈을 높이 들어 위를 쳐다 보라.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했느냐? 그분은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것들을 각각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의 능력은 크시고 힘은 강하시니 하나도 빠지지 않고 부르신다”(사 40:26).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족속들을 다르게 창조하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고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라 통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해짐
바울의 중보기도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됩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이 3장 16~17절 중반부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거하게 하시기를 빕니다”(16~17절).
가장 먼저 나오는 기도제목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핵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4절에 “그러므로 내가 당한 환란 때문에 너희가 낙심하지 않기를 당부한다”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낙심이라는 단어와 강건이라는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낙심하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이 강건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가장 먼저 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은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을 돌아보면 낙심할 이유가 얼마나 많습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 경제상황이 좋지 않는 등 낙심할 이유가 널려있습니다. 여러분, 속사람이 강건해짐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누리게 되는 천국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삶
여기서 말하는 속사람은 로마서에 나온 옛사람과 속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속사람은 헬라식 표현으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필러는 마음을 가리켜 사람 속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헬라 시대 사람들은 마음을 속사람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구약에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단순히 얼굴 생김새나 옷차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을 제외한 모든 것을 외모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지식, 판단, 생각, 사실 등은 겉사람입니다. 속사람은 우리들의 내면입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한 마음의 중심이 속사람입니다. 세상은 겉사람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겉에 속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식, 성취, 업적, 외모, 환경 등을 추구하다가 낙심하고, 무너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겉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욥은 몸을 강건하게 하는 음식보다 영혼을 강건하게 하는 말씀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외면을 치장하고 단장하는 노력보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데 먼저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함께 거하시는 그리스도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 3~4절).
우리가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는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도 고쳐야 하고 신비한 체험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속사람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함께 붙인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성령님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일과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거하는 것이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이 두가지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온전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성도들도 분명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가 주인이라 말하지만 방문객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체험은 영구적입니다.
토양을 바꾸시는 성령님
성령님이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온전히 계실 때 우리의 인생은 사랑가운데 세워진 집이 됩니다. 대개 인생의 많은 문제는 뿌리가 토양에 잘못 뿌리내릴 때 생깁니다.
미음과 상처 위에 인생의 뿌리가 내려지면 언제나 흔들리고 무너지고 나쁜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양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용서하시고 변화시키는 목적이 바로 토양을 바꿔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인생의 뿌리를 내릴 때 풍성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깊이 뿌리 내리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한평생 포기하지 말아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두 번째 기도제목이 18절에서 19절 전반부에 나옵니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18~19a).
두 번째 기도제목은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와 깊이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실하게 붙잡고 그 사랑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늠할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너비는 모든 민족과 열방을 품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선교하지 않습니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너비를 깨달으면 열방에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종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벽을 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도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머물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달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는 어떻습니까. 죄를 많이 지은 흉악한 인생일지라도 죄에서 건져낼 수 있는 정도의 깊이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신 사랑입니다. 그렇게 큰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는 어떻습니까. 그 높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늘에 앉힌바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져야 되는 영혼들을 하늘에 앉히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한평생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모두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갈 뿐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까지
세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에까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과 두 번째 기도제목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에 정도에 이르기 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19b).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는 최고의 기도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정도까지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진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온전히 머무신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 길이와 높이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정도까지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면 아버지의 아들들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마 5:43~45a).
사랑으로 지배 받는 인생, 성령의 충만함으로 강건하게 되는 인생,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님으로 좌정하시는 인생, 그리스도의 사랑의 규모를 깨닫는 인생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까지 이르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0~21절).
하나님은 언제나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구하지 않은 것도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 한 구절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달은 말씀보다 훨씬 풍성한 말씀을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구하는 것보다 크고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 고백을 일곱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실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하실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거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하실 수 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훨씬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다.
일곱 번째 단계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훨씬 더 능히 하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의 노래
사도 바울은 최상급의 표현을 세 개나 썼습니다. 그가 문법을 몰랐기 때문에 같은 의미의 표현을 세번이나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노래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 우리의 화평 (에베소서 2:11-22) (0) | 2017.07.22 |
---|---|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1-13) (0) | 2017.07.21 |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에베소서 4:7-16) (0) | 2017.07.18 |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에베소서 4:1-6) (0) | 2017.07.14 |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 받은 교회 (에베소서1:13-14) (0) | 2017.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