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건물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집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힌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외시킨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소외시킵니다. 소외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이유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절).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누군가를 소외시키던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화목하게 되면서 경험하는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멀리 있던 자들이 가까워지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만큼 큰 변화는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된 이유를 네 가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름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으면 햇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랑의 빛, 은총의 빛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짙은 먹구름이 깔려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죄가 산맥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산의 높이는 측량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죄악의 산맥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쌓아 올린 죄를 생각해보고 그 높이를 산의 높이에 비유해 보십시오.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산맥이 하나님과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진 축복
셋째,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계곡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레바스를 아십니까. 크레바스는 히말라야 같은 곳에 깊이 파여 있는 흠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크레바스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진노의 계곡에 빠져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생긴 하나님의 진노의 계곡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려움의 바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고 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장애물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소외되고, 갈등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깊은 산맥이 있고,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있습니다. 짙은 먹구름도 깔려 있습니다. 늘 불안의 파도가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살펴보고자합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그러므로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육신적으로는 이방 사람들이었고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11~12절).
여기나오는 일곱 가지 표현들은 바울이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입장에서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의 상태를 평가한 것입니다. 먼저 일곱 가지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방사람들, 둘째,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 셋째,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넷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제외된 사람들, 다섯째,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 여섯째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 일곱째,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서 평가를 해보겠습니다. 이중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첫째, 이방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방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이방사람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째, 할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셋째,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넷째,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제외된 사람들 이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애물
다섯째,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 다윗, 모세, 다윗 등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에 대해서 알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섯째,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 반드시 건짐을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입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일곱 가지 모습 모두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는 자격으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반목이나 적대감, 소외가 생기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들 때문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소외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장애물을 만든 주된 원인은 율법이었습니다.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간에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허무신 예수님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걸림돌이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장애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잣대로 들이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헐어 내셨고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분 안에서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자기 안에서 원수된 것을 없애 버리시기 위한 것입니다”(14~16절).
여기서 원수된 것을 헐어 버리셨다는 의미는 율법을 폐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원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은 분명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선하신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오, 선물이요.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율법을 내려놓지 못하는 유대인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율법의 의식과 제사법은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 율법입니다. 이제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본질이 온 것이요, 예언된 분이 오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내려놓아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은 종교 이상이었습니다. 신앙 이상의 수준이었습니다. 문화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문화적 충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율법이 문화가 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방인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베드로도 율법이 문화가 된 세계관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헬라 문화에 익숙한 사도바울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율법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셨고, 예루살렘 공회에서 더 이상 율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이끌어 내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또 다른 율법, 또 다른 문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얽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라온 문화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과 문화를 혼합시켜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멸시했는지는 성전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뜰을 만들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방인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누구든지 허용된 곳 이상을 들어오다가 잡히면 사형을 당하는데 그 책임은 오로지 허용된 선을 넘은 사람의 잘못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종교입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장벽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지성소로 나아올 수 있는 십자가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모두가 성도, 제사장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소외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또 다른 하나는 개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경멸했냐면 이방인 산모가 진통을 해도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방인을 태어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들에게만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헬라인들은 인간의 종류를 헬라인과 야만인으로 구분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헬라인들이 아닌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야만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잘못된 구분방법이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나온 것인데 바로 평신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중세시대 교권주의가 있을 때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 짓는 잘못된 단어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평신도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가 성도요,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유대인뿐만 아니라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교만으로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선택을 받고 먼저 율법을 받은 것이 그들의 능력입니까. 율법을 그들이 만들었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로 주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유대인들이 만든 조항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 자신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의 능력인양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분명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헬라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면 안 됩니다. 먼저 깨닫는 지혜와 지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다른 사람을 소외 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기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하나님처럼 누군가에게 절대적 요구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셨습니다. 그 시대에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내가 경험한 영적체험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경험이 기적일수도 신비한 현상일수도 있습니다. 은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한 영적체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교회의 본질, 새사람으로 변화
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주님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구세주, 우리 인생의 주님, 모든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일 뿐만 아니라 화평을 이루시고, 전하신다고 했습니다. 담이 허물어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화평을 이루고, 화평을 전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화평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둘로 한 새사람을 창조하심으로’으로 화평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로마서에 말한 옛사람과 대조되는 새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 되는 새사람,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인류에는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바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에 속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사람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구원계획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거나 나그네들이 아니라 성도들과 동등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19절).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시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시민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 시민과 가족 누가 더 가깝습니까. 가족은 피로 연합된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사람들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돼 주 안에서 함께 자라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20~22절).
이제는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건물입니다. 또 벽돌과 벽돌이 떨어져 있지 않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건물은 살아있는 건물입니다. 생명이 있는 건물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집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힌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안에 화평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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