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세월을 아끼십시오. (에베소서 5:15-21)

새벽지기1 2017. 7. 26. 07:37

 

삶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십시오.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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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시죠?”라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사 이면에 숨어있는 많은 문제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가 쓴 글 중에 “바쁘시죠?”라는 인사가 왜 무서운 인사인지를 설명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쁘다는 말은 헌신의 징후가 아니라 배신의 징후이다.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목사라는 말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마치 어떤 아내에게 ‘부정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과 같고, 은행원에게 ‘횡령하는’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과 같다.’


목사에게 바쁘냐는 인사가 왜 나쁜 단어일까요. 또 바쁘냐는 인사가 왜 헌신이 아니라 배신이고 게으름일까요. 바쁜 목사는 나쁜 목사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바쁜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가 되기 쉽고, 바쁜 엄마는 나쁜 엄마가 되기 쉽습니다.

 

미래 지향적 문화

 

일이 많은 것과 바쁜 것은 다릅니다. 일이 많아도 분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이 적어도 분주할 수 있습니다. 시간관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삶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시간관념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초까지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민족이 있는 반면,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 약속장소에 와도 미안한 기색이 없고, 기다린 사람도 화를 내지 않는 민족도 있습니다.


미국 IVF소속 선교사로 남미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윌리엄 맥 코넬은 사역하면서 북미와 남미의 시간에 대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문화를 시간의 관점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미래 지향적 문화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서구사회의 문화입니다. 우리도 이 문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을 쪼개서 관리하는 문화입니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한된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시간을 통제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면서 놓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건 지향적인 문화

 

둘째, 사건 지향적인 문화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사건에 충실하였는지를 지향하는 문화입니다. 아프리카와 남미 민족에게 나타나는 문화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민족은 한해가 365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날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 해를 보냈다는 의미는 중요한 사건들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한해가 지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중심으로 사는 문화에서는 해가 바뀌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끝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사는 문화에서는 시간이 흘러 해가 지나도 중요한 사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한해를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볼리비아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볼리비아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것도 힘겨운 여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예배장소로 갔습니다. 정말 피곤한 나머지 예배가 2시간 정도면 끝나니까 마치면 빨리 쉬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두 시간 동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찬양인도자가 인도 하는 대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찬양은 계속되었습니다. 찬양하는 시간이 길다고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도 설교를 한 시간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쉬려고 했는데 특순을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해서 특순을 봤습니다. 그런데 특순을 두 시간 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순을 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나와서 하는 특순이었습니다. 그리고도 예배는 이어졌습니다. 날이 샐때까지 그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시간 개념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회를 원시사회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남미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은 사건 지향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우리는 서구문화의 틀 속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시간에 30분만 늦어도 실례가 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 숨어있는 세계관은 시간이 제한된 자원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아껴야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사건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은 ‘세월을 아끼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시간관념의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권면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세월을  뜻합니다.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헬라어로 시간을 설명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이것은 시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이뤄지는 때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나오는 ‘때가 차매’라는 말씀은 카이로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의식하신 모든 때는 카이로스를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를 아끼라는 단어는 ‘구속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을 되찾으라는 뜻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외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내적인 시간입니다.

 


시간에 대한 문화차이


크로노스는 시계의 시간이지만 카이로스는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미래지향적인 서구문화를 중심으로 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건 지향적인 문화에 적합한 시간입니다.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어부들은 달을 보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농부들은 해를 보고 농사지으러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건 중심적인 시간으로 살았습니다.


룻기에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룻을 책임지기 위해서 결단을 하는데 나오미와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더 가까운 친족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자기에게 룻을 책임지는 우선권이 없었던 보아스는 우선권을 가진 친족을 만나 결판을 지어야 했습니다.


“한편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앉아 있더라”(룻 4:1).


보아스는 그 친족을 만나기 위해서 성문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고 이메일도 없었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성문에 올라앉아서 그 사람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방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시간에 대한 문화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시계가 발명되면서 유익도 있지만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계와 우리의 시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인간이 발명한 크로노스에 의해서 움직이기 보다는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계에 따르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시계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금이 아니라 생명이다. 시간은 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서서히 일하십니다.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를 훨씬 빨리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인내 하시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는 기회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회를 되찾으라는 것은 적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올바른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 
 
에스더서에서는 카이로스를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함에 의해서 죽게 되었을 당시에 에스더가 왕후였습니다.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게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 줄 누가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은 하나님이 에스더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에스더를 왕후의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카이로스입니다.


우리에게도 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지금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뤄지도록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지각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16~17졸).


인생이 짧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서 써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고 때가 악하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시간도 타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모든 것을 이용해서 인간을 협박합니다. 어쩌면 사탄은 인생이 짧다는 것을 이용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지만 당황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을 살기 때문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조급하게 해서 죽음 앞에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삶
 
어떻게 하면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예수님은 불과 33년을 사셨습니다. 얼마나 짧은 인생입니까. 만약 우리의 인생이 33세에 끝난다면 모두 아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계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에 아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짧게 살면 아깝다고 하고, 길게 살면 충분히 살았다고 하는 것은 영원을 사는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3세의 인생을 살았지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할 목적을 모두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늘 아쉽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지 않으면 후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때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기도 하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생을 사셨기 때문에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배의 충만

 

여러분,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 크로노스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신 일을 잘 분별하십시오. 그 일에 자신의 삶을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분별하고 부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거절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삶을 집중할 때 시간을 되찾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여러분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18~21절).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술 취한 상태에서는 결코 시간을 아끼거나 시간을 구속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술 취함의 결과는 방탕입니다. 방탕은 분별과 대조됩니다. 술 취함은 분별력을 잃게 만들지만 성령 충만은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술 취함은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만 성령 충만함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술은 단순히 알코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문화를 통칭해서  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령 충만 하면 신령한 예배를 드립니다. 성령 충만은 예배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 시간은 예배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에 움직이는 인생은 예배의 자리를 지킬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 순종, 절제의 열매

 

성령 충만 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감사의 충만입니다.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이 흐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이유는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때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지키게 됩니다. 성령 충만 하면 서로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순종의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결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견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아충만이요, 고집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절제가 없으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성령 충만은 스스로 충만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그리스도를 경외하게 되고 서로에게 복종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기꺼이 따라줍니다. 이것은 평등보다 한 차원 높습니다. 천국은 평등이 아니라 서로 복종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종하는 공동체는 성령 충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합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이 뜻을 이루시는데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십시오. 세월을 아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세월을 아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때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운 인생의 계획과 목표에 사로잡힌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