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7) 새로운 생명 형식

새벽지기1 2017. 6. 5. 07:04


7. 새로운 생명 형식

초기 기독교는 이 종말을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경험했으며, 이에 토대해서 전혀 다른 생명 세계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종말에 성취될 참된 생명이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선취(先取)되었다고 믿는다. 원래 복음서 기자들은 부활 사건의 세세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부활보도가 매우 산만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예수의 무덤이 비었으며 죽었던 예수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현현 했다는 사실만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했다. 우리는 지금 2천년 전 예수 공동체에게 일어난 현상을 확증하기 힘들지만 그들이 세계의 마지막 날에 예수에게서 발생했던 부활 사건이 모든 죽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확신했다는 점만은 일단 인정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확신한대로 과연 종말이 올 것이며, 그 때 모든 죽은 이들이 부활하게 되고 온전한 생명의 세계가 완성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따질 겨를이 없다. 또한 그렇게 왈가왈부 하더라도 역시 어떤 객관적 판단이 종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보충적인 논의만으로 이 문제를 마감하려고 한다.

예수는 종말에 발생하게 될 부활의 나라에서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가고, 흡사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했다(마태복음 22:3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희열이라고 했다(로마서 14:17). 또한 그는 마지막 때에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한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53). 이런 일련의 언급들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삶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이 도래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 변화된 몸, 혹은 생명의 다른 형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지금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완성될 종말이 이르러야 실증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잠정적이고 무상한 생명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절대 생명을 의미하는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극복되었다고 믿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자신을 의존시키고 살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단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지평에 속한다.  

아마 어떤 사람은 "그것 봐라. 또 이상한 말만하지. 새로운 생명 형식과 영적인 세계 운운한다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망상적인 자기 기만에 불과한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 형식을 내다보고 기대한다는 게 그렇게 무모하고 허망한 것은 아니다. 미래의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우리의 손에 잡혀 있지는 않지만 이미 선취된 한 사건을 통해서 그 미래의 생명 세계를 예기한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삶의 태도가 아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종말론적인 부활 생명이 참된 생명의 미래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보다 더욱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인간이 과학과 복지 제도를 통해서 이 땅 위에서 세워나가는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지상낙원이 생명의 궁극적인 리얼리티를 확실하게 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세계는 여전히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무상성을 벗어날 수 없다. 혹은 어떤 원리에 따라서 생명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생명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도 없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자리로 돌아올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으로 영원히 존재한다면 결코 절대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생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인 부활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가 희망하는 종말론적인 부활 생명이 비록 현재의 생명 형식과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이지만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흡사 씨앗처럼 그 미래의 생명을 현재의 생명 형식 안에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인 사랑의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궁극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미래의 생명을 참되게 희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산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새로운 생명 형식을 내다보는 사람만이 잠정적인 현재의 생명을 초월함으로써 진정한 세계 연대성을 회복할 수 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러한 미래를 희망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한 희망 가운데서 자기 실존을 꾸려나가고 있다. 
  

끝으로, 오늘 이렇게 궁극적인 생명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인간을 비롯해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생물학적인 연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게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생명 이해를 전제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존재가 신비이듯이 생명은 미래를 향해 열려진 신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 위에서 인간의 생물학적인 건강을 확보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일련의 행위가 과연 인간이 자기 실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의 양식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영)의 양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마태복음 4:4참조). 이런 점에서 모든 죽은 자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될 종말(미래)의 시각에서 오늘의 생명 현상을 조명하고 규정해나가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생명의 본질을 열어가려는 오늘의 모든 자연과학적인, 그리고 인문학적인 작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