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5) 창조와 진화

새벽지기1 2017. 6. 2. 07:26


5. 창조와 진화  

생명 현상을 하나님의 영과 연관해서 이해하고 있는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핵심은 생명이 바로 신에 의해서 시작했고 유지되며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소위 창조론이다. 아마 이 말을 듣는 이들 중에서는 이미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이 끝장난 마당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하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기독교가 진화론에 대해서 독단적으로, 혹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탓이 크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재단해 버린 기독교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론이 말하려는 바의 근본이 제대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진화론과 창조론을 그렇게 첨예하게 상치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역사를 잠시만 되짚어보자.

1859년에 발행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결국은 헉슬리와 후커 등의 지원을 받은 진화론이 기독교 일각에서 끈질기게 제기된 창조론을 제압하고 학문 세계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미 지동설 문제로 인해서 이런 학문세계에서 권위를 손상 받은 기독교는 이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진화론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신학이 자연과학을 비롯한 일반 학문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엄밀한 과학적 자료와 분석에 근거한 진화론이 가져온 사태 앞에서 기독교가 취한 태도는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위 "창조과학회" 류의 사람들로서,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과학적으로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진화론의 허점을 자기들 나름의 과학적 논리를 통해서 집어내고 성서가 오히려 과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변호한다. 예컨대 노아 홍수 때의 방주를 찾겠다고 터키의 계곡 사이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이 아모리 민족과 전쟁할 당시에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을 잠시 멈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를 성취한다는 성서 구절이 나오는데(여호수아10:12), 몇 가지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이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성서의 창조론을 진화론과 대치시킴으로써 성서와 기독교의 권위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노력이 아무리 눈물겹고 절실하지만 이런 자세는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에 별로 귀를 기울일 만한 주장이 못된다. 이들은 과학과 신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동함으로써 성서를 과학이라는 범주 안에 속박시켜버린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의 근원과 실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서나 과학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이 놓친 셈이다. 따라서 신학은 자연과학과 맞서는 또 하나의 유사 자연과학을 생산하려고 공연한 수고를 기울일 게 아니라 자연과학적 사실을 기초로 해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자세다.

두 번째의 태도는 과학과 신학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갈라놓는 것이었다. 과학은 과학이고 신학은 신학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인 진화론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고백인 창조론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신학자는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칼 바르트다. 소위 말씀의 신학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신학적 특성에 의하면 신학은 세계의 학문과 과학에 대해서 관여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보도라 할 성서를 해석하는 것에 한정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바르트에 의해서 확고한 틀을 형성하긴 했지만 이미 신학과 교회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일반학문 세계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한 이후에 자폐증을 앓듯 끊임없이 자기 내부로 숨어든 역사적 과정과 연관선상에 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하듯이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만이, 혹은 리츨이나 헤어만이 말하듯이 인간의 윤리만이 기독교의 관심분야가 되고 말았다. 앞서 설명한 창조과학회 류의 입장은 기독교 내부에서 소수의 근본주의자들과 관계된 저항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의 입장은 기독교의 주류를 대변하고 있는데, 이들도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설명해야할 자신의 기본적인 책임을 유기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다른 세 번째의 흐름이 있는데, 위에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적 창조 개념이 그것이다. 자연이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진화해 나간다고 주장한 그에 의하면 세계의 실재와 사실들을 밝히는 빛이라 할 진화론은 단순히 생물학의 한 분야이거나 신학적으로 검증 받아야 할 가설이 아니라 지구의 운명을 형성하고 있는 중심 원리다. 진화의 과정은 복합적 의식의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이 법칙이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첫째, 물질은 시간을 통해서 점차 복잡한 구조로 진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둘째, 물질의 복합성의 증대에 상응해서 물질에 의식이 발생한다. 따라서 의식은 주입된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의 산물이다. 그의 입장은 우주를 물질계로부터 정신계로 진화해나가는 생물학적인 지평에 설정함으로써 진화론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던 기독교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하는데 공헌하긴 했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작지 않은 틈을 보인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태도 이외에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에 확고하면서도 이 세계의 생명 현상에 대한 설명인 과학적 탐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오늘의 새로운 자연 신학적 대안이 있다. 이는 곧 신학과 철학과 과학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신학자 볼파르트 판넨베르크의 견해이다. 우선 신학의 입장에서는 자연과학의 사실적인 논거에 대해서 시비를 걸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과학은 늘 한 현상에 대해서 실험하고 분석함으로써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사물과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체세포 복제나 게놈연구에서 밝혀진 생물학적 사실의 경우에도 역시 유효하다. 다만 신학은 우선 과학자들이 생명현상이라고 부르는 그런 생물학적 현상이 궁극적으로, 혹은 보편사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언급할 수 있다. 나아가 그런 궁극적인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 부분적인 현상 연구가 결국은 생명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다는 점도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이해와 신학적 이해는 실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생물학적 연구는 생명에 대한 부분적인 현상을 엄밀한 증빙에 의해서 드러내는 작업인 반면에, 신학은 생명의 궁극적이고 전체적인 리얼리티에 대해서 성서의 전통과 기독교 사상의 전승에 근거해서 예기(豫期)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바로 자연과학과 신학이 생명이라는 화두를 놓고 함께 논의해나갈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 있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이고 신학은 주관적 체험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입장과 방향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록 실험실에서 얻어진 답변은 아니지만 신학도 역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오늘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을 배타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이 양측이 진리론적인 태도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간(間)학문적인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세계와 생명을 신의 창조물로 주장하는 기독교의 입장이 실제로 진술하고자 하는 그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