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3)

새벽지기1 2017. 5. 29. 07:22


3. 생명 현상의 우연성

생명 현상을 고찰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눈여겨보아야 한 점은 오늘 이 지구상에 나타난 생명체들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없을 수도 있는 아주 우연한 현상이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간혹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모습을 한 생명체가 바로 지구에 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구상에는 그런 외계인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절대적으로 전제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되었다. 따라서 지구의 생명현상이 근본적으로 우연의 지평에 속한다는 점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강신익의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 기능의 그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별로 많지 않으며, 설령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단지 통계학적인 연관성만이 주어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생명체에서 유전체의 염기서열이 완전히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체(대장균, 초파리 등)를 완전히 알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유전체를 "인간 종의 역사"라고 보았으며, 유전체 속의 유전자는 "역사 속의 사건"이라고 규정했다(창비 113, 2001년 가을). 어떤 사건이 똑같은 역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닌 것처럼 유전자만으로 유전체를 온전히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기계적 역학이 어느 범주 안에서만 동일한 규칙성을 보일 뿐이지 그 범주를 벗어나면, 즉 양자와 같은 미시의 세계나 우주 공간의 거시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의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문제를 불확정성 원리에서 증명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오늘의 결과가 기계적으로 도출되는 조건이 충족될 때만 설득력이 있는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은 자신들의 이러한 학문적 토대의 한계를 전제해야만 한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현상이 원래 이런 원인과 결과의 규칙적인 반복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현상만 보고 현재를 분석하기는 어렵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약간만 높았다면 세계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에 의해서 역사 자체가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반드시 물리학과 생물학의 원리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힘을 전제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에서는 카오스 이론이나 장 이론이 제시된 바 있다.

물론 앞으로 이런 자연과학이 좀더 발전하게 되면 생명의 모든 현상과 원리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명 현상에 대한 정보를 알면 알수록 물리적 메커니즘을 뛰어넘는 어떤 요소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으로 밝혀지는 사실들이 전혀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좀더 포괄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관점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의 접목은 일찌감치 이루어졌으며,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역시 매우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다. 철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그것이 결국 존재하는 것들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우리 인간들의 노력이라면 이 두 학문이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은 이 두 학문만이 아니라 예술, 문학, 고고학 등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그것이 진리론적 바탕에 투철하기만 하다면 모든 사물과 현상의 궁극적 토대인, 따라서 구원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열어 가는 작업에서 같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도 예외가 아니며, 필자가 이제부터 이 글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이런 사유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