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1) - 죽음

새벽지기1 2017. 5. 25. 07:09


생명의 영, 미래의 힘(1)


1. 죽음

우리 가족은 함께 모이는 저녁 식탁 자리에서 간혹 초보적이긴 하지만 철학이나 물리학, 또는 종교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죽음이 화제가 된 날 저녁에 초등학교 4년인 둘째 딸이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죽는 게 무서워요." 생명의 충만을 향해서 쭉쭉 뻗어나가야 할 어린 소녀가 비장한 어조로 내뱉은 이 말은 무(無)에 대한 실존적인 자각이기보다는 무언가 자기에게 익숙했던 세계와 단절된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죽음과 삶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게 이에 대한 답변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건 잠이 무엇인지 알며, 내일 아침에 다시 깨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두려울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잠에서 깨듯이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이해하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죽음 같은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이렇게 오랫동안 애를 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완전히 사라질지, 환생할지, 다른 생명체로 윤회할지, 부활할지 아무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게 두려움의 뿌리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죽음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은 이 땅에서의 삶에 집착한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난 인류사에서, 특히 인간의 문명 역사가 시작한 이후로 인간이 정치, 종교, 경제, 과학 등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잠시만 더듬어보아도 이것은 아주 자명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서 건축한 피라미드는 바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웅장하고 장엄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으로부터 2001년 9월11일 테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간의 노력으로도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확인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그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그렇게 애를 쓰다가 죽어갔을 뿐이다. 생각해 보라. 만리장성을 건축한 중국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고 생명의 비밀을 밝혀낸 것일까? 로마의 씨이저들이, 혹은 미국의 대통령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취로 인해서, 달을 정복한 인류가 그것으로 영원한 자유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생명의 궁극적인 본질이 밝혀졌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도 인간의 생명을 성취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생명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고 싶어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약간씩 우리를 자극할 뿐이지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인간을 다시 일상적인 불안과 허무 속으로 몰아갈 뿐이다. 심지어는 절대의 세계를 성취해나가는 예술행위도 그것 자체로는 온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베토벤이나 윤이상, 렘브란트, 혹은 톨스토이 같은 이들이 자기들의 작품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과 미술, 혹은 문학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기가 생산한 것에서 결정적인 구원(생명)을 얻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생명의 세계에 가까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멀리 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인지 모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자는 당대의 최고 음악가들을 가혹하리 만치 비판했다. 온갖 연주 기법은 인간을 오히려 작위적 체계 안에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소리의 도(道)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규범마저도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즉 참된 생명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장자의 생각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인간이 예술, 윤리, 문학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도 고대인들이나 지금 우리나 마찬가지로 생명의 근본을 별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생명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걸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의 일에 집착함으로써 무언가 생명을 성취해보려는 인간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재 드러나 있는 모든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사실도 역시 생명의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주지 못한다는 데에 생명의 근원에 도달해보려는 인간의 시도는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고대인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생명 현상에 대한 정보를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거기다.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우리도 그렇다.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도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우리도 역시 그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대인은 생명체의 유전암호를 어느 정도 풀어냈기 때문에 생명 현상에 상당히 접근했다고 볼 수도 있다. 수년 전 복제 양 돌리 사건이 전 세계를 충격과 놀라움으로 휘몰아친 이후로 그와 유사한 유전공학적 사건들이 줄을 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것이 바로 인간 생명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요술상자인 것처럼 온갖 기대를 모아가고 있다. 설령 세포 하나로 그 세포의 주인과 똑같은 생명체를 기술적으로 생산해내고, 그런 생명공학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유전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왔다고 하더라도 생명 현상이 완전히 그 껍질을 벗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명 공학이 이루어낸 업적이라는 것은 결국 생명 현상을 부분적으로 해명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지 생명 자체를 조성해내는 것은 아니다. 체세포에 일정한 기술을 가함으로써 양이나 인간을 복제해낼 수는 있지만 돌이나 철로부터 어떤 생명체를, 혹은 무에서 생명체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어떤 과학자도 실험실에서 몇 개의 원소를 결합해서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기고, 거기서 다시 단백질이 생성되고, 거기서 다시 단세포 생명체가 발생했다는 진화론에 근거해서 먼 훗날 인간이 이런 생명 발생을 인위적으로 재생시킬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설령 진화론적인 생명 발생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이미 생명 현상이 이 지구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엄청난 우주론적 격변기를 거쳤으며, 매우 우연한 사건의 연속에 의한 결과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생명을 단순히 실험실에서 반복적으로 생산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 문제는 인간이 풀어내거나 성취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벗어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