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4) 생명의 영

새벽지기1 2017. 5. 31. 08:09


4. 생명의 영

기독교 사상은 유대 사상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신(神)과 연관해서 생각한다. 구약성서에 신이 언어(로고스)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내용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빛,  둘째 날- 하늘, 셋째 날- 육지와 식물, 넷째 날- 별, 다섯째 날- 날짐승과 어족, 여섯째 날- 들짐승과 인간. 신이 육일 동안 우주와 생명체의 창조를 끝내고 칠일 째 쉬었다는 전승에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생각하고 노동을 멈춘다. 아주 지독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이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첫째 날, 둘째 날을 지금의 하루로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간의 기간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신이 온 세상과 생명체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다른 생명체에 비해 인간은 약간 특이한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生靈)이 되게 했다. 인간 창조 사건에서 핵심은 흙과 영이다.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에 대한 서술에서는 그저 신이 언어로 만들었다는 사실로 끝나지만 인간 창조에 대한 서술에서는 훨씬 구체적이고 확실한 내용이, 즉 흙이라는 질료와 영이라는 형상의 결합이 부가되었는데, 이유는 인간 창조를 모든 창조의 완성으로 여긴 탓인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계 내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서 훨씬 탁월한 생명 형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인간 창조의 특수성은 받아들여질 만하다.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에게 생명과 흙의 연관을 깊이 통찰하도록 각성시킨다. 우리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은 흙에서 시작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윤기와 탄력을 자랑하는 젊은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흙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모든 식물은 뿌리를 흙에 대고 대기 중에서 탄소를 받아들여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생명을 연장시켜 나간다. 동물들은 이런 풀이나 나뭇잎을 먹기도 하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도 하는데, 그들도 결국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별게 없다. 쌀이나 밀이 몽땅 흙의 소산이고, 소고기도 역시 풀을 먹는 소의 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몽땅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도 토끼나 다람쥐처럼 똑같이 이 흙에서 나와서 주어진 것만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너무 일반론적인 표현이지만, 이런 점에서 땅이 곧 생명이며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가 진술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 중에서 신이 인간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영적인 존재가 되게 했다는 사실이 성서의 인간 이해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창조 때 원시 대양의 물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생기, 곧 영을 불어넣어 사물로부터 영적인 생명체가 되게 했다. 구약성서에서 이 영은 인간이 숨을 거두면 죽는 것처럼 호흡, 혹은 바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에스겔의 환상에 의하면 광야의 마른 뼈들 위에 하나님의 영이 호흡처럼 불어와서 생명을 되찾게 된다. 이런 서술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성서가 영을 생명의 힘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구약성서는 신(神)적인 영이 바람이나 폭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을 보이지 않은 어떤 힘으로 간주했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에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힘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헬라 사상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에게도 영을 의미하는 프뉴마나 호흡을 의미하는 프노에는 상관적 개념이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생각했고,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영)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영은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기(氣)나 도(道)와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기독교 사상의 영과 동양사상의 기나 도는 한결같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말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양기도 장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되었고, 맹자의 호연지기도 우주에 충만한 광대한 기라고 생각되었는데, 이것 역시 몸에 가득히 차 있는 그 무엇이다. 기는 산천 등의 자연 속에서 느끼는 영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음양과 오행으로 발전하여 우주 구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었다. 영이라고 불렀든지 기라고 불렀든지 언어의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개념이 일치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여호와라 하든, 알라라 하든 상관이 없듯이 영과 기나 도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영과 기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한 요소가 있다. 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관과 동양 신관의 차이에 토대 하는 것으로서 영의 인격성을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근본인 영이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이해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일종의 자연 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기도 한 그 거룩한 영의 뜻과 인간의 반응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생명의 역사가 진행된다고 보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원리인 그 기와 도에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영이 인격적이라는 말의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영이 인간의 사유를 초월해서, 즉 우연한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과연 생명은 역사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시작되고 유지되는 한 현상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로 영원한 자연의 한 속성인가? 우리는 이 자리에서 어떤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접어두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