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생명의 영, 미래의 힘(6) 미래의 힘

새벽지기1 2017. 6. 3. 09:15


6. 미래의 힘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유지하고 완성한다는 기독교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실질(實質)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진화론이었든지, 아니면 지동설이었든지, 오늘날의 양자역학이나 역장이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역사와 종교사, 궁극적으로 인간 생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실과 현상들이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당장 우리 인간이 살아가며 확인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아는 게 중요하지 종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공연히 그렇게 뜬구름 잡는 주장을 하는 건 인간의 삶을 기만하는 요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기독교를 향한 이런 날카로운 비판은 그 역사가 깊다. 포이에르바흐로부터 시작해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러셀 등 많은 사상가들이 기독교의 도그마를 비현실적이며 민중 기만적인, 그리고 정신 분석적으로 미숙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예컨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허망한 하늘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는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땅에 충실하라고 외쳤으며, <도덕계보학>에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무신론을 주장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기독교 신앙을 죄의식에 근거한 일종의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으며, 마르크스도 민중의 아편이라고 혹평했다. 필자는 니체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인간학적 비판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지향하는 기독교 사상이 그렇게 단순한 인간의 자기 투사이거나 현실 도피적인 망상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각은 엘리야데가 분석한 것처럼 현실의 문제를 간단히 미래로 유기시켜 버리기 위한 탈역사적, 세계 도피적 편의주의가 아니라 참된 생명이 완성되는 때에 대한 시각을 미래에 두자는 사상이다. 일종의 미래적 존재론이다. 이는 곧 오늘의 결정론적인 역사관과 과학관을 극복하고 모든 사물과 생명이 완전히 그 실상을 드러낼 종말의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보는 태도다. 오늘의 모든 학문과 인간 행위가 그러하듯이 현재를 현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부분적인 분석으로만 끝나버리지 실질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묶어내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온전한 정체성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혹은 죽음 이후에야 온전히 드러나는 것처럼 우주 전체의 운명과 본질도 역시 종말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은 근본적으로 역사 결정론의 극복이며,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미래(종말)로 열려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시각은 신구약성서의 중심 사상이다. 우선 구약성서는 세계를 헬라인들처럼 공간적인 의미의 <코스모스>로 여기지 않고 시간적인 의미의 <에온>으로 보았다. 헬라인들이 세계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순환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유대인들은 시작과 끝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역사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모든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전한 생명의 세계가 다가온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곧 그들의 묵시문학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그들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혹은 비참하다고 하더라도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함으로써 잠정적이고 무상한 이 세계를 견뎌냈다. 그 마지막 때가 되면 오늘의 이런 생명 형식과는 다른 생명 형식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 세계는 곧 생명의 영이 충만하고 생명의 영이 통치하는 세계다. 다음에 인용한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된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구약성서, 요엘3:1,2).

구약성서의 이러한 묵시문학 사상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종말론적인 역사관으로 연결된다. 특히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표상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인 시각에 근거했다. 그가 가르친 모든 비유와 아포리즘(경구)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표상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5장3절-8절에 나오는 소위 "행복예찬"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과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했는데, 이런 일은 우리의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배고픈 사람이 배부르게 되는 때는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형식은 적자생존의 질서에 의해서 운영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가 없지만 이런 형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식에 의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분명히 가난한 자가 행복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는 이런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살았기 때문에, 즉 자신의 삶을 이런 종말에 전적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현실유지(status quo)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종교(유대교)와 정치(로마제국)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의 사상과 그 사건을 체계화한 바울도 그 종말론적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