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6) (고전 1:22-23)

새벽지기1 2017. 4. 27. 12:1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오늘의 교회는 2천 년 전 바울에게 진 빚이 크다. 빚이라기보다는 덕이라고 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그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가 없었다면 교회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소위 열두 사도로만은 뭔가 부족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 전통에 서있었다. 오늘의 교회는 유대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기독교를 그 뿌리로 한다. 이방 기독교의 태두가 바로 바울이다. 그는 기독론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독론에 의해서 유대교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오늘 묵상 구절도 그 중의 하나다.

 

본문에서 바울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열거했다.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다. 우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였다. 구약은 이런 표적에 관한 이야기다. 표적은 매력적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샘이 터졌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는 초자연적 표적이 많이 나온다. 신약에도 표적 이야기는 많다. 예수가 오병이어를 들고 축사 한 후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한다. 현대인들도 표적을 찾기에 바쁘다. 오늘의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에 몰두한다. 대개는 교회 성장이다. 표적 신앙은 기본적으로 나쁜 게 아니다. 다만 표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표적 신앙에 떨어지면 신앙의 본질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바울에 따르면 표적에 마음이 기울어진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둘째로,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지혜의 전통은 문명사회의 특징이다. 유대인들에게도 지혜의 교사라는 전통이 있다. 문명 자체가 지혜의 결과다. 철학 민족인 헬라인들에게는 이게 더 유별나다. 그들은 만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늘 궁금하게 생각했다. 어떤 이는 그걸 물이라고도 했고, 네 가지 원소라고도 했고, 이데아라고도 했다. 세상의 원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이 질료와 형상으로 작동된다고 보았고, 제논 같은 스토아 학자들은 그런 작동의 기초가 로고스라고 보았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존경받는다. 현대는 아마 돈 버는 기술을 아는 사람을 지혜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표적을 구하거나 지혜를 찾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표적과 지혜를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표적이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다. 지혜도 필요하다. 지혜는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이나 지혜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것은 늘 상대적인 것이다. 표적이 없어도 괜찮고, 지혜가 없어도 괜찮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다. 왜 그런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신앙이 일종의 종교적 처세술로 떨어지는 오늘의 세태에서 이런 경향은 더 노골적이다. 가장 큰 왜곡은 십자가를 주술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포 영화에서 마귀를 쫓아낼 때 십자가 모형을 들이밀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저절로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여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인 십자가를 승리의 표시로 여긴다. 중세기 때의 십자군 전쟁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앞세워서 전쟁에 임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이자 모독이다. 그런 식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말아야만 했다. 하늘의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괴멸시켜야만 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죄책감의 징표로 여긴다.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린다.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자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바로 하나님의 죽음을 가리킨다. 세상을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크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예수에 의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데까지 내려갔다. 이를 통해서 놀라운 일이 일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자는 비록 십자가와 같은 고난과 고통과 죽음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가 갔으며, 부활 생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표적이나 철학적인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를 궁극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전한다.

'좋은 말씀 > -사순절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순절 묵상(38) (요 13:14)  (0) 2017.05.01
사순절 묵상(37) (요 13:21)  (0) 2017.04.30
사순절 묵상(35) (사 42:7)  (0) 2017.04.26
사순절 묵상(34) (막 10:33,34)  (0) 2017.04.25
사순절 묵상(33) (빌 2:17-18)  (0) 2017.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