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3) (빌 2:17-18)

새벽지기1 2017. 4. 23. 16:05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2:17-18)

 

요즘 한국 교계는 목사와 교회, 목사와 장로, 당회와 집사 사이에 많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가장 큰 원인은 목사에게 기인한다. 교회 안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지위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여자 목사가 드문 까닭인지 여자 목사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는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목사와 달리 여자 목사는 근본적으로 모성적인 목회 마인드가 강한 탓인지 모르겠다. 신자들끼리의 갈등도 적지 않다.

 

아무리 신앙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교회에 자정 능력이 있느냐, 하는 거다. 서울 서초구의 요지에 수년 전 초현대식 매머드 교회당이 들어섰다. 그 교회는 제자교육으로 유명한 교회다.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제자들과 제직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그 다툼이 수년간 지속됐다. 쌍방은 이 문제를 일반 법정으로 끌고 갔다. 진풍경도 자주 벌어진다.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모든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한다. 일반 법정으로 간다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그 교회를 성직자 중심제도라고 우리가 비판하지만 자정능력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제도가 바람직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이렇게 앞 대목에서부터 거론하는 이유는 오늘 묵상의 본문에 나오는 바울에게서 바람직한 목회자 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목사들이 바울과 같은 태도로 교회를 돌본다면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바울이 모든 교회와 늘 좋은 관계를 맺은 건 아니다. 그의 진정성이 지역 교회에 의해서 훼손되는 경우도 많았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바울은 배척받기도 했다. 바울의 목회가 완벽했다는 말도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아무런 잡음 없이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목회자의 태도는 오늘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자기 성찰의 기준으로 삼을만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한다. ‘전제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다. 구역이나 개역 성경이라면 모를까, 개역개정 성경에서도 이런 단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성경번역 담당자들의 판단 착오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의 심정을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빌립보 교회 교우들의 믿음과 교회생활이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 자체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이런 말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자. ‘우리 인생은 일절 너희에게 바쳐진 거야. 너희만을 위해서 우리는 산다.’ 실제로 헌신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자녀들을 자신들의 계획대로만 끌어갔다면 자녀들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주는 거다. 목사들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사안에서 충돌이 일어났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목사들도 있다. ‘나는 목회에 내 목숨을 걸었다. 여러분들 중에서 나만큼 교회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바울의 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삶이 중요하다. 바울은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기만을 바랐다. 이런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런 성찰을 해도 실수는 나오지만, 그런 성찰마저 없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게 없다.

 

바울은 17,18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쁨을 강조한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로마나 에베소 지역) 갇힌 몸이다.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서 그는 기쁨을 노래한다. 16장에 따르면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역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찬송은 기본적으로 기쁨에서 나온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소아시아 전도가 막히자 유럽으로 건너가 최초로 복음을 전해서 결실을 맺은 교회다. 그런 탓인지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가 각별했다.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의 선교활동을 꾸준하게 재정으로 도왔다.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고 5,6년 세월이 지나 옥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를 썼다. 빌립보 교회로 인해서 자신은 기뻐한다고, 당신들도 기뻐하라고, 함께 기뻐하자고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존재론적인 차원이다.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조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나는 기쁘다.’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게 아니다. 기뻐할 조건들을 채우는 것도 아니다. 기쁨 자체에 연결됨으로써 저절로 기쁨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이런 기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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