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2) (시 118:22,23)

새벽지기1 2017. 4. 22. 07:27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가 메시야라고 한다면 당연히 악을 박살내고 천하를 손아귀에 넣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을 괴멸시키고,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워야만 했다. 이런 생각이 당시 고위층과 민중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메시야 사상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로마의 정치범에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마 16:21-28절에 나온다. 예수는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은 뒤에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만류했다. 메시아는 고난당하거나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심판하고 전권으로 통치해야만 한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책망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이 책망에 따르면 베드로는 광야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나 마찬가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가 왜 구원의 길인지를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해명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해당되는 구절의 하나가 바로 시 118:22절이다. 이 구절은 마 21:42, 4:11, 벧전 2:7에서 인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구절이다. 버린 돌과 머릿돌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속담이다.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기는 쉽지 않다. 버린 돌은 용도 폐기 된 것이니까 쓰레기장으로 가야하고, 머릿돌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건축자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경우나 건축자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안목이 있는 이가 나타난 경우에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될 수 있다

 

미켈란젤로에 얽힌 일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로마 거리를 걷다가 대리석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한쪽에 굴러다니는 대리석을 보았다.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리석 폐기장으로 보낼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주인에게 저 돌을 달라고 말했다. 아무 소용이 없는 돌을 무엇 때문에 달라 하느냐, 하는 주인의 말을 듣고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눈에는 저 대리석 안에 피에타 상이 들어 있다.’

 

시편 기자는 23절에서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으로서 우리 눈에 기이한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버린 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린 자는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였다. 예수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일망정 그런 생각을 한 건 분명하다. ‘머릿돌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킨다. 부활은 궁극적인 생명이다. 생명의 나라를 집으로 비유한다면 예수는 그 집의 머릿돌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분명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시편의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그리스도라니, 이걸 누가 인정하겠는가. 십자가에 달린 자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니, 이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기이한 일을 일으키는 분으로 묘사할 때가 많다. 그분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분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고 홍해를 가르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한 일이 다 기이한 일이요, 놀라운 일이다. 이런 것을 단순히 호기심 천국 수준으로 보면 곤란하다. 우리의 예상과 추측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가리킨다. 이런 말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아주 실질적인 삶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포도원 주인 비유(20:1-16)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루에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은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을 지급했다. 이건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면 망한다. 그렇지만 이게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다. 그에게는 노동의 기회가 없었다. 노동의 기회가 제공되기만 한다면 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열 시간 일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일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나가서 그 어떤 사람도 세상에 생존하는데 일당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에 대한 거룩한 상상력이 궁핍해서 삶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는지. 이 모든 놀라움의 토대는 하나님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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