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0) (행 2:24)

새벽지기1 2017. 4. 19. 07:38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24)

 

사도행전에는 여러 편의 설교가 나온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가 대표적이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은 베드로의 활동이 중심을 이루니까 설교도 베드로의 것이 많다. 2:14-36절은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설교다. 오순절은 유월절 오십 일 후의 절기를 가리킨다. 농사절기로만 본다면 초여름 추수 때다. 날짜순으로 정리하면 예수는 유월절에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지상에 머물다가 승천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순절이 되었다. 당시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를 추종하던 120명가량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마가의 집 다락방에 자주 모였다. 오순절에 그들은 성령을 경험했다. 그 내용이 행 2: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 제자들은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설교가 행 2:14절부터 나온다.

 

베드로는 구약 요엘 선지자의 글(2:28절 이하)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연관된 구절이다. 요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신다고 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다는 뜻으로 요엘 선지자를 인용한 것이다. 영을 받은 사람은 를 부르게 될 것이고, 주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자신들이 부르는 가 누군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주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다. 그 이야기가 22-24절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로마 법정에 고발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셨다다는 것이다. 더 압축하면, 세상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게 초기 기독교 설교의 원형이다.

 

24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자.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마술을 부리듯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게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다.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셨다. 유대인들에게 죽음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죽어 썩는 시체를 보면 고통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지하 영역을 음부라고 생각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음부는 죽음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 머무는 곳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긴 사건이다. 생명의 나라는 물론 하나님이 전적으로 통치하는 곳이다. 그런 일이 예수에게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났다. 그를 믿는 자들은 생명의 나라로 간다. 이게 초기 기독교부터 지금까지 기독교가 신앙의 중심에서 믿고 있는 진리다.

 

생명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실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과 차원을 같이 한다. 그리고 세상의 완성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서서 그 나라를 규정할 수는 없고, 그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다. 대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사실도 이를 가리킨다. 그래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남아 있다. 예수의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는 부활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무조건 생명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예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은 실제로 무엇인가?

 

오늘은 간략하게만 말하자. 모든 것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날 종말이 오기 전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부활의 리얼리티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사이에 긴장이 있다.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여러 증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성 있게 그런 작업을 수행하면 부활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우리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건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리 경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진리 사건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신학공부가 밑받침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유의 책을 통해서 부활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의 부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좀더 선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전업 목사로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지 일반 평신도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역할은 교회에서 막중하다. 그가 구도적인 태도로 기독교 신앙을 따라가지 않으면 일반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들이 미로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른다는 게 더 큰 문제이긴 하다.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15:14)의 꼴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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