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8)

새벽지기1 2017. 4. 17. 1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7,8)

 

오늘의 성서일과(lectionary)에서 복음서에 해당되는 구절은 요 12:1-11절이다. 예수가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라는 마을에 들어갔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때가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의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다. 앞으로 엿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베다니는 얼마 전에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마을이기도 하다. 본문이 그걸 밝히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요 11장에 자세하게 나온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기보다는 임사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죽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네모 난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이다. 물론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말의 의미도 달라지기는 한다. 예수의 부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을 통과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어쨌든지 베다니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예수가 유월절 엿새 전에 그 마을에 들어갔는데 어느 누군가가 예수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아 있었다. 마리아아 마르다 이야기는 눅 10:38-42절로 유명하다. 거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서 부엌일에 열심이었다.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나사로가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나온다. 독자들은 마리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할지 궁금할 것이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 한 병을 가져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고 한다. 이 장면은 예수가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은 자리에 죄 많은 여자가 등장해서 향유를 부은 사건(7:36절 이하)과 비슷하다. 그러나 전제 이야기의 진행은 마 26:6-13, 14:3-9절과 비슷하다. 복음서 기자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이야기의 원형을 찾기는 힘들다. 마르다를 죄 많은 여자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힘들다.

 

가룟 유다가 이 여자의 행동을 비판한다. 비판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향유를 3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다의 속셈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가 가난한 자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 자체에 욕심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다의 발언이 있기 전에 예수를 잡아 줄인물로 규정했다. 존재 자체가 악이면 그에게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 나와도 그것은 악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논란 끝에 예수가 나서서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집중 묵상 구절이다. 그것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서 묵상의 주제로 삼겠다

 

1) 그를 가만 두어라.’ 예수는 유다에게 마르다의 행동을 멋대로 재단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사람은 각각 자기 주관이 강하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주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분란도 많이 일어난다. 비틀즈의 노래 가운데서 <렛 잇 비>가 있다.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 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신앙에서도 서로를 가만 두는 게 필요하다. 목사도 신자들을 닦달하지 말고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2)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곧 부패하기 때문에 깨끗이 씻기고 냄새를 막기 위해서 적당한 향유를 발랐다. 마리아의 행위가 바로 이런 장례 절차의 하나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도 모른 채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른 채 엄청나하게 귀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3)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아니다.’ 유다의 생각은 합리적이며 휴머니즘적이고, 율법적이다. 여기서 유다가 돈에 욕심을 냈다는 요한의 평가는 염두에 두지 말기로 하자. 마리아가 한 순간에 뿌린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요즘 노동자의 일당을 십만 원으로 계산하면 그 액수는 삼천만원 이상이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는 유다의 주장을 아무도 반박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을 했다. 사람은 휴머니즘으로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만 예수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의 발언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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