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9) (사 43:11)

새벽지기1 2017. 4. 18. 07:10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11)

 

오늘의 구약 본문인 사 43:8-13절에 나오는 문장들은 힘이 넘친다. 특히 11절이 압권이다. ‘가 반복된다. 여기서 는 여호와, 즉 주(). 모든 이들의 주인 에게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냥 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출 3:14절에도 나온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는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를 보낸 이가 누군지 밝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 앞에서 대답할 말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당신이 이름이 뭔지, 즉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구절에는 각주가 달려 있다. 히브리어로 나는 나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를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 루터 번역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존재하게 될 그 자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와 인식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류는 하나님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런 방식으로 배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전해들은 것을 나열해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자비가 넘친다. 하나님은 창조주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축복하신다.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주신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신다. 이런 걸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여기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것 자체로 명백한 것도 있지만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들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런 규정들을 아무리 많이 나열해도 하나님이 그 안에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도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이미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부를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의 한 분파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원어 발음에 더 어울리게 하려면 야웨가 맞는데, 불렀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라는 것이다. 루터는 출 43:11절에 나오는 여호와를 Herr로 번역했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하면 이렇다. “Ich, ich bin der Herr.” 이걸 다시 우리말로 직역하면 , 바로 나는 그 주().”가 된다. 참고적으로 고대 유대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른 이들도 있다. 신학에서는 이 두 분파가 기록한 문서를 가리켜 그 이니셜을 따서 각각 J 문서, E 문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주()라는 말은 그에게 절대적인 주권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다. 이런 관계는 두 가지 비유로 종종 표현된다. 하나는 목자와 양이고, 다른 하나는 토기장이와 질그릇이다. 두 가지 비유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양은 목자를 향해서 왜 험한 길로 가는지, 이 길로 가면 풀이 없을 거 같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질그릇은 토기장이에게 왜 자기를 귀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았는지 따질 수 없다. 이런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결속을 통해서 끌어올리려는 데에 있다. 이런 신앙의 바탕에서만 나 곧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은 이해된다.

 

이어서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는 문장에서 이를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장은 구원의 배타성을 가리킨다. 이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이 영혼을 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쓴다. 물불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행위를 보라. 자기 구원이다. 돈은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탁발 수도승이 아니라면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보려는 생각과 의지가 문제다. 돈만이 아니라 자기를 완성해보려고 기울이는 모든 노력들은 자기 구원이다.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노력의 하나인 극단적 휴머니즘을 보라. 테레사 수녀의 행위처럼 숭고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휴머니즘을 무가치하다는 게 아니다. 단순히 교리적인 주장만도 아니다. 구원의 실체를 가리킨다. 테레사 수녀 역시 자기의 행위로 영적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말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비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구원을 규정하거나 범주화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이건 하나님의 전권이다. 이걸 구원 허무주의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구원의 절대성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리킨다. 우리 앞에 드러나야만 그제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구원의 절대성 말이다. 이런 구원의 절대성이 아니라면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차원에서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외쳤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선포는 곧 예수에게 해당된다. 예수 외에 구원자가 없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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