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4) (막 10:33,34)

새벽지기1 2017. 4. 25. 12:07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10:33,34)

 

우리말 성경에 막 10:32-34절은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죽음과 부활이 여러 번에 걸쳐서 주신 말씀인데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종교재판과 사법재판을 받을 때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예수가 신성모독과 사회소요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을 뿐이다.


그들이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상황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은 제 삼자로 머물렀을 뿐이다. 십자가 현장에는 오히려 여자들이 가까이 있었다.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안치한 이도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인물이다. 제자들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의 예고를 허투루 들었다는 증거들이다. 예수의 예고에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면에 않게 하여 달라.’고 요구한 것을 보면 한참 철이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틀 전의 묵상에서도 한 번 짚었지만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수가 단순히 랍비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함을 당한다거나 모욕을 당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비일비재했다. 예수는 메시아였다. 메시아에게 고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전()이해에 묶여 있는 그들에게 고난과 죽음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도 반복된다.

 

부활에 대한 예고도 마찬가지다.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문장은 실제 부활을 말한다기보다는 종교적 격언 정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예수가 부활을 확신했다면 십자가 죽음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살아날 것을 뻔히 알면서 죽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에 떨어졌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마술사들의 태도와 다를 게 없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능하면 피하게 해달라는 예수의 기도도 역시 예수가 부활을 확신했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혼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는 데에 있다. 승리자로 오실 메시아가 왜 고난을 당해야만 했는가? 복음서 기자들을 비롯해서 신약성서 기자들은 그 대답을 구약 선지자들의 전통에서 찾았다. 14:65절에서 그대로 실행된 위 묵상 구절의 내용은 사 50:6절의 인용이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역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의 이 본문은 그 유명한 고난의 종에 속한다. 이런 종류의 글이 이사야에 몇 번에 걸쳐서 나온다. 이사야는 자신의 처지를 바탕에 둔 채 하나님의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신학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고난의 종이라는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이건 메시아사상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다. 버림받음의 증거였던 고난과 십자가가 구원의 증거가 된 것이다. 역설이다. 모두가 피하던 것이 모두가 원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에서 해방 받지 못했는데, 무엇을 근거로 해방 받았다고 주장하는가, 하고 반론을 펼칠 수도 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대답을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여기서 관건이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제 고난과 죽음이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내가 고난당하는 그 자리에 예수가 함께 하며, 내가 죽는 그 자리에 예수가 함께 할 것이다. 이게 이해되는가? 한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5번을 영혼의 깊이에서 연주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자리에 베토벤이 함께 했다고 말해도 된다. 피아노 음악이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기 때문이다. 성찬의식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고난과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체험한 사람은 그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당연히 믿게 된다. 이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해방된 사람이다. 그 사실을 각자의 신앙 분량에 따라서 충분하게, 또는 어느 정도 부족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예고한 그대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갔다. 그런 길을 피해보고 싶은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생애 초기에 세 가지 시험을 이긴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이를 극복했다.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절대적인 고독에서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 실존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맛보았다. 바로 그의 영적 실존은 몰트만의 저서 제목처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