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5) (사 42:7)

새벽지기1 2017. 4. 26. 08:51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이사야에는 영적으로 주옥같은 문장들이 다수 나온다. 오늘의 구약 성서일과인 사 42:1-9절 사이에도 여러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1절은 이렇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하나님이 자신의 종을 택해서 쓰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종과 맺는 관계가 세 가지로 나온다. 내가 붙든다. 내 마음에 기뻐한다. 내가 택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영을 주신다. 이것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은 정의 실현이다.

 

3절은 이렇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어려운 형편에 놓인 이들 중에서 이런 구절을 통해서 위로받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온 이들의 운명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다.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은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삶의 위협 가운데 떨어진 이들을 살려내는 일이다.

 

오늘 집중 묵상 구절인 7절도 잘 알려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사 61:1()에도 나온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는 처음으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이 본문을 택했다(4:18). 예수가 자신의 소명을 이사야의 설교와 연계해서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단서가 마 11:2-6절에 나온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물었다.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인가, 우리가 다른 이를 더 기다려야 하는가?”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사상이 강했다. 세상의 구원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당신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한다. 그 일들이 마 11:5절에 열거된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와 똑같은 내용이 눅 7:22절에 병행구로 나온다. 복음서의 이런 내용들은 이사야의 설교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해도 틀린 게 아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을 위 묵상구절에서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 2)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낸다. 3)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한다. 갇힌 자와 흑암에 앉은 자는 비슷한데도 여기서는 구별되어 있다. 흑암에 앉은 자가 단순히 갇힌 자보다는 상황이 더 나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지 이 세 가지에서 핵심은 어둠에 있던 자들로 하여금 빛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 문장에서 sollen이라는 조동사를 사용했다. 이 조동사는 어느 누구의 명령대로 해야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혀야만 한다, 고 말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런 뉘앙스를 느낄 수 없다. 현대어 영어성경은 can 조동사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종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독일어 조동사 sollen이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훨씬 강하게 드러난다. 루터 신학이 이런 번역에도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사야는 이 문장에서 자기 동족 유다의 해방을 꿈꿨을 것이다. 유다는 지금 바벨론에서 눈먼 자로 살아간다. 감옥에 갇힌 거와 같다. 이사야가 유다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들이 지금 포로 신세라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유다가 영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데에 있다. 유다가 비록 바벨론 포로 신세로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올곧게 유지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영적 촉수를 예민하게 작동시키고 있다면 굳이 그렇게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상상해보았다. 처음에는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바벨론 문명에 적응해가지 않았겠는가. 개인에 따라서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끝까지 하나님 신앙을 잃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사는 걸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의 하나가 바벨론 문명의 우월성이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모든 부분에서 근동을 지배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 나라에 비하면 유다는 삼류 국가였다. 바벨론 제국이 특별히 차별 정책만 쓰지 않았다면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은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바벨론 체제에 길들여지면서 만족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이사야의 눈에 눈먼 자들이다. 하나님의 종은 그들의 눈을 밝혀서 그들이 못 보고 있는 것을 고쳐주어야만 했다. 그런 역할을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다.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이 이사야의 소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과 연결해서 받아들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사야가 말하는 빛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복음서 기자들과 같은 생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42:6)이라고 믿는다. 이런 신앙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며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