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7) (요 13:21)

새벽지기1 2017. 4. 30. 08:4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13:21)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에도 다 나온다. 그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들과 몇 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다른 제자들은 북부 지역 출신인데 반해서 유다는 남부 출신이다. 유다는 거의 유일한 지식인 계급에 속한다. 그가 예수 공동체의 재정을 맡았다는 것은 나름으로 그런 지성적인 부분이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유다가 제자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는 불가사의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가 제사장들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그럴 정도로 수준이 낮은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유다의 기대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메시아 관의 차이가 작용했을 수도 있고, 로마 정부나 유대 고위층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서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다. 예수 앞에서 유다가 겪었을 실존적 고뇌를 소설로 다룰 만하다. 유다는 개인적으로 예수에게 틈틈이 자기 생각을 개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오천 명이 이상의 군중이 모였을 때 차제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자는 복안을 전달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개인적인 상상력일 뿐이지 복음서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다. 분명한 사실은 유다가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 뿐이다.

 

유다의 배신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는 배신하게 될 유다를 왜 제자로 삼았을까? 예수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해서 그대로 용인한 것인가? 본문에 따르면 예수는 이 일로 인해서 크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자신이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 일로 굳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닐까? 예수는 결국 제자 교육에 실패한 것은 아닐까? 유다가 사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는 그를 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면 결국 유다의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니까? 이어지는 질문으로서 예수가 배신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류 구원의 길이었다면 유다의 책임은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예수가 제자에게서 배신을 당했으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역사적 계기였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에 따라다니는 또 다른 제자는 베드로다. 어떻게 보면 유다보다 베드로의 행위가 더 비겁하다. 마태복음(27)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를 판 다음에 후회하고 제사장들과의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베드로는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그는 닭이 울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울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행동 자체만 놓고 본다면 똑같이 문제가 많았다. 베드로는 사도의 수장으로 인정받았고, 유다는 복음서가 읽히는 곳에서 가장 저열한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사도신경에 유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고난당했다는 사실만 언급된다. 유다의 배신이 우리의 예상과 달리 초기 기독교에서 그렇게 큰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증거인지 모르겠다. 앞에서 나는 네 복음서가 다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서의 전통과 사도신경의 전통에 약간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지금 내가 자세하게 살펴볼 겨를이 없다. 이 문제를 잘 정리하면 신학 석사 논문으로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3:30절은 유다가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밖으로 나갔을 때가 밤이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자주 나온다. 이 대목에서도 유다의 행위가 어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배신은 분명히 악이요 어둠의 일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구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악은 악이다. 하나님이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고 해서 악이 용납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유다는 자신이 선생을 배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다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정확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추종했던 예수에게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열정이 크면 분노도 큰 법이다. 지금 우리가 유다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악에 속했으며, 자신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라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룟 유다는 사라졌다. 복음서 기자들은 한 순간 예수를 배신했다는 사실보다 훗날 교회를 등졌다는 사실을 더 심각한 문제로 판단한 게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