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9) (시 22:1)

새벽지기1 2017. 5. 3. 09:59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2:1)  


시편 22편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에 대한 구약의 근거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 것 중의 하나다. 1절은 마 27:46절에, 7절은 마 27:39절에, 8절은 마 27:43절에, 15절은 요 19:28절에, 16절은 요 20:25,27절에, 18절은 요 19:23,24절에, 22절은 히 2:12절에, 24절은 히 5:7절에 인용되었다.

 

22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가 직면한 실존이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2). 그래서 그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한다(6). 사람들이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보시지.’ 하고 조롱한다. 자신의 처한 상황을 극적인 문장으로 묘사한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14). 그래도 결국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한다. “내가 ... 주를 찬송하리이다.”(22).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시는’(24)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는 우리가 본문만으로 알기 어렵다. 하나님마저 그를 포기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느낄 정도의 참담한 상황에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욥에게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상황을 추정해볼 수 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 그런데 그는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도 잃는다. 극심한 피부병에 걸린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이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와서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8)고 말한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떠났는지는 욥기가 확인해주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그대로 남편 곁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아내의 말은 남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라는 충고에 가깝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자신이 공연히 태어나서 이런 환난을 당한다는 한탄이다.

 

이 세상에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다. 얼마 전에는 독일 비행기가 바르셀로나에서 뒤셀도르프로 가다가 알프스의 어느 산자락에 추락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부기장이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추락시켰다고 한다. 그곳에 타고 있던 150명의 사람들은 이유 없이 생명을 잃은 것이다. 인류 역사에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오죽 많은가. 언젠가는 핵발전소의 사고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무죄(無罪)한 이들의 고통 문제는 성경에서도 중요한 주제다. 이를 신학 용어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 악이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신학은 악의 독자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악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 있다. 악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자유를 행사한다. 욥을 파멸로 이끈 사탄은 하나님에게서 허락을 받았다. 그렇다면 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또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 악은 악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설명으로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 다 해명되지는 않는다. 신학이 풀지 못한 숙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신정론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이 문제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무죄한 이들이 고통당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하늘에서 관망하는 분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을 신앙적으로 훈련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무감정의 존재로 인간 고통에 초월해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똑같이 참여한다. 그것의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여섯 시간 정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외쳤다고 전한다.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으로, 22:1절의 인용이다. 예수는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평소에 이 구절을 비롯해서 시편의 여러 구절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나를 버리는가.’ 하고 하나님을 향해 외쳤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앞에서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당시 십자가의 죽음은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가리켰다. 아무도 그렇게 죽은 사람을 동정하지 않았다. 예수의 이런 경험은 모든 유신론적 신 개념의 극복이다. 유신론적 신 개념은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죄가 없는 이가 가장 극심한 벌을 받았으니, 유신론 개념과 대립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죄한 이의 죽음을 대표한다. 이런 죽음의 나락에서 예수는 건짐을 받았다. 십자가에 달렸던 이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 이제 인간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같은 고난, 고통, 불행, 절망에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히 파멸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