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8) (요 13:14)

새벽지기1 2017. 5. 1. 10:4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3:14)

 

오늘은 세족 목요일이다. 교황께서 노숙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의 사진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질 것으로 예상된다. 개신교회에서도 담임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들이 신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가 벌어지곤 한다.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건 그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의 발을 씻어주고, 자식이 늙은 부모의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 것일까?

 

세족 의식은 요한복음 전승에 근거한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세족의식이 없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에 일어난 사건을 아주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그 사건을 몰랐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알면서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제쳐놓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가 기록된 시대에는 이 전승이 아직 구체화되지 못했다가 예수 사건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요한복음 시대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고 말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는 공관복음에 비해서 대략 한 세대 후다.

 

요한복음의 세족 전승은 다른 이야기와 뒤섞여 있다. 가장 깊이 개입되어 있는 이야기는 가룟 유다에 관한 것이다. 13:1절과 2절은 예수와 유다를 대조시킨다. 마지막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직감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한 마음이 극에 달했고, 유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예수를 팔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예수는 사랑으로, 유다는 배신으로 규정된다. 13장 마지막 구절인 38절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베드로는 바로 앞에서 세족의 중심인물로 등장했었다.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는 베드로의 요구를 듣고 예수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셨다(10). 이어서 14절에서 세족 명령을 내리신다. 그것은 곧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산다. 성경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14장과 고전 13장은 사랑 예찬으로 유명하다. 각각 한 구절씩만 인용하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여기 이 구절뿐이겠는가. 성경을 펼치면 곳곳에서 사랑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사랑하라고 외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병든 사람을 방문하고, 노숙자들과 결식자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걸 제공하라고 한다. 그게 부활절 절기의 세족 의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랑을 설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걸 일반화하면 곤란하다. 그런 설교는 가현설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 헬무트 틸리케의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설교자가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사회 시설을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라고 외쳤다. 설교 후에 한 기업가가 찾아와서 물었다. 그는 양로원이나 병원을 자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자기에게는 서로 경쟁하고 있는 기업체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아마 그 설교자는 대답이 궁했을 것이다.

 

사랑은 철학적 관념이 아니고, 그렇다고 율법실천도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전 13:2). 구제와 희생이 사랑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일서의 진술도 바로 거기에 초점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능력에 사로잡힌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것만큼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렇지만, 실제의 삶에는 간단하지 않다.

 

발을 씻어주라.’는 예수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게 가능하겠는가? 한두 번은 가능하겠지만 연속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목사 사택에 노숙자가 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다. 하루가 아니라 반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자. 아니면 교회당에서 하룻밤 묵자는 요구를 받았다고 하자. 그런 일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 목사 개인은 극도의 자제심으로 그런 일을 감수한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목사 가족의 삶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생활이 흐트러질 것이다. 이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이의 발을 씻어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제자들의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충분하게 살피지 않은 채 답을 찾으려고 하면 곤란하다. 세족으로 상징되는 사랑실천을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서만 찾는다면, 예수의 세족 사건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배신은 초기 기독교에서 반복되었다. 요한공동체에서는 그걸 더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배신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또는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길은 서로 발을 씻어줄 정도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