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선교의 회복
1991년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이인호 목사님이 중국 선교를 자청하고 나서, 당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입국 및 체류가 쉽지 않았을 때였다. 이 목사님은 92년부터 중국과 한국을 왕래하는 방식으로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주로 조선족들이 많이 있는 길림성 등 동북삼성을 다니면서 가정교회를 지원하였다. 이목사님이 동북삼성을 누비고 다니면서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로부터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이 목사님으로서는, 계속 그런 식으로 선교를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이 목사님은 94년 교구 담당으로 복귀했고, 직접 선교는 후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런데 95년 5월, 중미에 있는 코스타리카 시온 한인교회 김재만 장로님으로부터 목회자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먼저 현지를 찾아가 확인한 다음,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당회는 금상호 목사님을 파송하였다. 10월이 되어서는 뉴질랜드 한종배 장로님으로부터 역시 목회자 파송 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도 먼저 현지를 확인한 뒤, 당회는 본인의 뜻에 따라 이동규 목사님을 파송하였다. 이 목사님이 부임하기 전에 그 곳 교인들은 교회 이름을 미리‘오클랜드 주님의교회’라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해 봄에는 미국 이정식 집사님이 변용진 목사님과 함께 ‘남가좌주 주님의교회’를 개척하였다. 변 목사님이 방한하여 우리교회를 견학한 뒤였다. 그 후 남가주 주님의교회에 의해 방송선교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 전해에는 중국에 진출한 홍근용 장로님의 공장에서 천진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다. 그 해 5월에 양동훈 장로님과 함께 나는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때를 맞추어 천진 한인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이성민 집사님이 기아대책본부에 의해 평신도 선교사로 캄보디아에 파송되었다. 주님의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였다. 이 선교사님은 그 곳에서 캄보디아 주님의 사랑교회를 세웠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김만조 선교사님은 블라가웨신스크 주님의교회를 또 그곳에서 세웠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계획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주님께서 주님의교회로 하여금 태평양을 중심으로 선교하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96년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교회들과 형제 관계를 맺고, 96년 10월 7일 부터 9일까지 ‘제1회 환태평양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97년에는 베트남 하노이 한인교회와 호주시드니 체스우드 한인연합교회와도 형제 교회가 되었다. 선교학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 말한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이요, 인간은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주님의교회에 선교가 회복토록 하신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