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보다 루터 킹이 위대한 이유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링컨은 이 선언을 위해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와 전쟁까지 불사했다. 그러나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흑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치적 선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흑인을 위한 법적 제도적 후속 조처가 전무한 가운데 흑인은,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후에도 근100년 동안 인종차별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흑인 빈민촌에 갇혀 가난과 무지를 벗 삼아 살아야만 했다. 링컨이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위대한 노예해방 선언을 하긴 했지만 그러나 미국의 현실 속에서 그 선언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표현처럼 마치 ‘부도난 수표’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에서는 흑인에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가는 즉각 법의 제재를 받는다. 백인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다시 말해 법적 제도적으로는 흑백평등이 이루어져 있다. 흑인이 백인과 결혼하는 데도 아무 제약이 없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흑인과 몸이 닿는 것이 싫다 하여 흑인을 농구 코트에 세워주지도 않았지만, 지금 미국농구 코트의 스타들은 거의 흑인 일색이다. 불과 30-40년 전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흑백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사회가 이처럼 대전환을 이루게 된 데엔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그 정점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자리 잡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가난한 흑인 전도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틴 루터 킹은 15세 때 애틀랜타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 19세 때인 1948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법학과 의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 재학 중, 간디의 비폭력 철학과 개신교 신학자들의 다양한 신학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51년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보스턴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 1955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난한 흑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처럼 백인 지배의 미국 사회 속에서 홀로 설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능력으로 자기 일신의 영달만을 꾀한 것이 아니었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 덱스트 가의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한 그는, 그 도시의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의 자리 양보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흑인 민권운동가가 되었다. 1953년에 결혼한 부인 코레타 스콧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지만, 그는 사익보다 공익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쳤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63년 8월 28일, 그는 미국 내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평화행진을 주도했다. 그날 미국 수도 워싱턴 소재의 링컨 기념관 앞에 운집한 20만 명 이상의 참가자들 앞에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세계 각지에 그의 동조자들을 만들었다. 이 평화행진을 계기로 그의 민권운동은 미국 여론의 반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이듬해인 1964년,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차별대우 철폐와 고용 및 공공소유 시설물에서의 불법적 인종 차별을 금하는 민권법이 통과되어 연방정부 관할하에 전국적으로 법의 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흑백 차별 철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흑인 민권운동에 나선 흑인은 비단 마틴 루터 킹 목사만이 아니었다. 말콤 엑스 등 많은 흑인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은, 그의 주장이 흑백 공생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흑인 지도자들의 민권운동은 대부분 그 동기가 백인에 대한 증오와 보복이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백인의 압제를 당한 만큼 궁극적인 목표는 흑백 평등이 아닌 흑인 우월 사회였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사상이 지배 계층인 백인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흑인 운동은 과격 양상을 띌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달랐다. 흑백 차별 타파는 단순히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에 갇혀 있는 백인의 승리임을 호소하였다. 그가 링컨 기념과 앞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설교에서 언급된 그의 꿈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아와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 이르기까지 옛날 노예의 아들들이
옛날 노예 주인의 아들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백인 어린이와 흑인 어린이가 형제와 자매처럼 손을 잡게 되는 꿈입니다.
이와 같은 킹 목사의 흑백 공생의 호소가 백인들의 양심을 움직였고, 그가 믿었던 대로 흑인의 자식과 백인의 자식이 법적 제도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링컨 대통령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훨씬 위대함을 알 수 있다. 링컨은 대통령의 직책과 권력으로 군대를 동원,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이룬 것이 노예해방 선언에 그쳤지만, 마틴 루터 킹은 총 한 자루 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미국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였다. 오늘날 링컨 기념관 화강암 계단위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간판이 부착되고, 기념관 1층에서 킹 목사의 육성으로 같은 제목의 설교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것은, 미국 역사에 끼친 그의 공헌이 링컨 대통령에 뒤지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마틴 루터 킹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보잘것없는 흑인을 도구 삼아 미국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현실 세상 속에서 그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것은, 그가 바로 이 시대의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흑인인 그의 외모를 보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그의 중심이었다. 자립과 공생의 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그의 중심 말이다. 마틴 루터 킹의 삶이야말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룻과 다윗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대 청년아!
우리 사회가 분열됨을 가슴 아파하지만 말아라. 남의 탓을 하지도 말아라. 그대가 이 시대의 다윗이 되어라. 그대의 중심을 자립과 공생의 교직판이 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자립과 공생의 수틀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대에게 총 한 자루 없어도, 그대에게 권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도구 삼아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대가 믿는 하나님은 3,000년 전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 우리 시대에 마틴 루터 킹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 미국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신 바로 그 하나님, 곧 역사의 주관자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