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크리스천과 신앙

새벽지기1 2017. 4. 23. 07:16


무당을 찾아간 사람이 두 손을 비비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경건하다.
굿을 잘 하기 위해 용한 무당에게 희사하는 금액을 한번 알아보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금액보다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한번 관찰해 보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그들을 가리켜 이 세상 누구도 신앙인이라 부르지 않고, 미신을 좇는 자라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신은 인간이 자기에세 있는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즉 자기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 바로 미신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참신앙은 하나님을 변화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 분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늘 변화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 하지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더 중요하다.


자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란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많은 권능도 행한 사람들이 나온다.
요즘 말로 하면 은사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도무지 알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들이 주님을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은 행했지만,
그들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삶이 날로 변화되어 가는 참신앙의 사람일 수 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현재 우리 나라에 있는 천만 명 이상의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로 부터 비난 받고 있다면,

먼저 나 자신의 신앙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참된 신앙의 소유자이기보다는,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 나의 목적만을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한평생 하나님을 나름대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당한다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미신이 아닌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참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세가지 사항이 있다.

그것은 첫째,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어난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은 죽음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산다는 것이다.

각자 수첩을 한번 펴 보라. 이번 주에 무슨 약속들이 있는가?
그 약속을 한 시점이 일주일 전이든지 혹은 한달 전이든지 간에, 날에 대한 약속을 과거에 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약속의 날싸까지는 죽지 않으리란 '착각'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는 사람은 있고,
그 중에는 노인뿐 아니라 청년과 어린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를 쌓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그 피라미드 속에 누워 있으면 죽음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파라오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피라미드는 도굴당하고 그들은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미라로 누워 있다.

그들이 피라미드를 쌓아서 만들때,

수천 년 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묘실까지 들어와서 짓밟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1994년 내가 피라미드를 찾았을 때, 파라오의 시체는 간 곳 없고
묘실 벽엔 다음과 같은 글씨가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1818년 3월 2일 메르사니'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그 피라미드 속 묘실을 발견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엄청난 피라미드를 정복하고 얼마나 기뻤으면 자기 이름을 그 곳에다 써 두었겠는가?
중요한 사실은 그 베르사니 역시 이미 죽고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해외 여행을 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꼭 그 나라 공동묘지를 찾아 보곤 한다.

공동묘지에 가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생사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묘지가 화려하다는 것은

모든 나라의 공통점이다. 또 카톨릭 국가일수록 묘지가 웅장하다.
그러나 묘지가 웅장하든 초라하든, 묘지엔 죽음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묘지에나 그 속에는 썩어 가는 시체나, 이미 다 썩어져 버리고 흙만이 있을 뿐이다.
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가면 조세프라는 사람의 묘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expected this, but not so soon.'
이렇게 죽을 줄은 알았지만 이처럼 빨리 죽을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미신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으며,

그 분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변화되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둘째 크리스천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2장 31절에서 32절을 통해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희에세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앍어 보지 못 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호칭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흙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어도 죽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체는 죽어 흙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을 보았을 때 자기 집 문 앞에 있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즉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1500년전에 죽었다. 그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 부터 내려 왔다.

모세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썩어 버릴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 강도의 육체는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 공동묘지에 버려졌지만,

그 영혼만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몇 해 전 파문을 일르켰던 모 신학교 교수처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왜 크리스천들은 구태여 육체가 부활하리라는 욕심을 내는 가?

왜 영의 부활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 신학교 교수는 부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부활은 회복을 의미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의 회복, 즉 창조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육체는 죽는 육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의 육체는 죽게 되었다.
그렇기에 영혼만 살아서는 완전한 구원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때에 우리의 몸마저 부활함으로 완전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때 몸의 부활이라 함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유한한 육체로의 부활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 없는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몸의 부활이라 함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쇠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범죄 이전의 영원한 육체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원한 몸의 부활 역시 이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스스로 확신하는 자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삼아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매일 학교를 다녀도 자신이 학생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인식 하지 못하는 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매를 들어도 안 된다.
자신이 학생임을 자각하는 학생만 자발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역시, 자신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아는 자만이 영원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한다.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참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거대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중동을 자세히 보라.
이스라엘은 새끼손톱 보다도 작은 나라이다.

면적을 통틀어도 경상남북도를 합친 넓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그 작은 나라 주위에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최대강국들, 이를테면 이집트 제국, 바벨로 제국,
앗수르 제국,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제국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다 사라져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지극히 작고 작은 이스라엘, 2500년 전 망하여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던 그 이스라엘은 지금도

바로 그 자리에 건재하다.
거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함께 하심을,

세계 지도는 오늘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사도 바울을 존경할 것이며, 사도 베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들은 돈이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가, 한 사람은 처참하게 참수당하고
또 한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

그 보다 더 처참한 인생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당시 거대한 것을 추구하던 부자나 원로원 의원의 이름은 모르지만,

바울과 베드로는 이름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진심을 다해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들은 지금도 역사 속에,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

그들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있든지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면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역시 위대한 신앙인다운 고백이다.
또 이사야서 52장 1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앞에도 계시고 내 뒤에도 계시다는 말이다.
즉 나를 둘러싸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와 함께 계시는 동시에 '너'와도 함께 계실 수 있는가?
빛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불이 환하게 켜진 방을 생각해 보자. 그 방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갔다면,
그 사람 앞에도 빛이 있고, 옆에도 빛이 있고, 뒤에도 빛이 있다.
그리고 그 방안에 세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도 빛은 세 사람 모두의 앞에도, 옆에도,뒤에도 있다.

그러나 그 방을 벗어나면 그 빛은 더 이상 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번에는 태양을 생각해 보자.
한 사람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태양은 있다.
10억의 인구가 있어도 태양은 다 그들과 함께한다.
내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도 태양은 거기에 있고,
반대로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가도 태양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땅 속으로 들어간다면 태양은 나를 따라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태양은 내게서 떠난다.
태양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아야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비로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에게는 스스로 예기치 상황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주신 분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그 상황 속에서 그 분이 이루기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믿음의 용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34편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는 찾를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다윗이 왕위에 있을 때 행한 고백이 아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웃나라 아비멜렉을 찾아가, 단지 살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사람 시늉을 할 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게 하심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게서 자기를 버리심이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 더 굳건한 신앙의 용장으로 세워 주시기 위함임을 확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사울 왕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사람이 죽을땐 못다 이룬 업적이나 실적을 두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나는 그동안 많은 사람의 임종을 보았다.

그러나 '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투자를 했더라면 몇 억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 라거나,
'그때 조금만 더 로비를 했더라면 더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을 텐데'
라고 후회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 했던 일이나,

정직해야 할 때 정직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고 그 분을 알며
믿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다.

어떤 경우에도 미신과 신앙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일평생 참신앙의 소유자가 되라.
그 때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멋지게 살다가,
호흡이 끝나는 날 멋지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아무 후회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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