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배의 회복
만인제사장설은 중세 개혁자들이 역설한 핵심사상이었다. 성경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더 이상 레위인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만을 통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만을 통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경은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데에는 특별한 조건이 따로 없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서전 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구원의 빛 속에 거하기만 하면 다시 말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그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만민이 구별 없이 제사장임을 성경이 직접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시는 통로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물 되어 돌아가셨을 때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갈릴리의 비천한 어부들도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바울 같은 살인자도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중세 개혁자들이 유독 이 만인제사장설을 강조했던 것은, 카톨릭 교회에서는 서품 받은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가 없으면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 당연한 결과로 사제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비 성경적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 구약시대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든 직접 예배드릴 수 있음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만인제사장 사상은 개신교의 기본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를 보면, 만인제사장이라는 성경 말씀은 대부분의 경우 부인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공식적인 주일 낮예배의 인도와 설교는 언제나 목사가, 그리고 대표기도는 장로가 거의 전담하고 있다. 왜 그들만이 독점하고 있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목사나 장로는 안수 받은 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서리 집사가 주일 낮예배 시간에 기도를 한다든가 혹은 목사와 설교를 나누어서 한다는 것은, 적어도 미 조직 교회가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상상치도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역시 안수 받은 사제가 있어야만 예배가 가능하다는 카톨릭이나, 레위 제사장을 통해서나 제사를 드릴 수 있던 구약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무엇보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는, 그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회복되어야만 했다.
나는 처음부터 예배 시에 목사 가운, 즉 성의를 입지 않았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 때에 스톨 같은 것을 착용해 본 적도 없다. 강단 위에는 아예 의자를 두지 않았다. 인도자, 기도자, 설교자는 모두 자기 순서 때에만 강단에 오르고, 순서가 끝나면 강단 아래쪽 교인 석에 함께 앉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똑같은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서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목사가 거룩한 성의를 입고 강단 위에 정좌한다는 것은 확실히 멋진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연중에 목사와 교인을 구별 짓는 행위 일 수가 있다. 목사 홀로 성의를 입고 강단에 앉아 있는 한, 그 예배에 참여한 모든 교인이 만인제사장일 수는 없다. 그만 홀로 제사장인 것이다. 만인제사장의 회복은 성의를 벗고 강단 아래에 앉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단지 세례식이나 혼인 예배등 예식을 집례할 때에 한해서는 성의를 입었다. 예식은 의식인 만큼, 그 예식과 관련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은혜로운 봉사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교회 주일 낮예배 시간에는 서리 집사들도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이 제사장임을 믿는다면, 서리 집사 역시 공식적인 예배에 전교 인을 대표하여 기도드릴 수 있음이 마땅했다. 그래서 남자 서리 집사들은 3부로 드리는 주일 낮예배 시에, 그리고 여자 서리 집사들은 주일 저녁 찬양예배와 수요예배 시간에 등록 순서대로 기도를 하였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에 이르러서야 남자 서리 집사만 주일 낮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또 다른 인위적인 구별임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께서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실 때 여자를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한국 교회가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세우는 바에야 두말 해 무엇하겠는가? 당회는 95년 11월, 4개월에 걸친 숙의 끝에 마침내 1996년 1월 1일부터 여자 서리 집사도 주일 낮예배 대표기도를 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장로, 안수 집사, 권사를 비롯하여 모든 서리 집사 역시 남녀를 불문하고 구별 없이 등록 순서대로, 주일 낮예배, 찬양예배, 수요예배 기도를 돌아가면서 맡게 되었다. 기도에 관한 한, 만인제사장 사상이 회복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교인들과 더불어 설교하였다. 본문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체험을 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와 함께 설교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간증 설교인 셈이었다. 순서는 내가 먼저 할 때도 있었고, 그 반대 경우도 있었다.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순서가 결정되었다. 단순히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시간에 설교를 함께 하는 것이니 만큼, 사전에 미리 원고를 받아 몇 번이고 수정하게 하였다. 설교 전에는 당사자와 함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집사님이 저와 함께 오늘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여 주옵소서"
교인과 함께 설교할 때마다 교우들은 언제나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곤 했다. 94년 어버이 주일 낮예배 시간에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범일 장로님을 모시고 효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효에 관한 한 그분은 탁월한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그 날 모든 교인들이 내가 설교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경험했음은 두말 한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이 주일 낮예배 설교시간에 목사 아닌 분들을 강단에 서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님 안에서 만인제사장임을 믿었던 까닭이다.
때로는 설교의 일부를 성극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특히 강남 YMCA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매년 고난주일마다 예수님의 고난을 성극으로 설교하였다. 탤런트 임동진 장로님이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극은 더욱 은혜로워졌다. 성극에 참여하는 한 분 한 분이 모두 설교자였다.
또 설교 후에 성가나 악기연주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시편이란 모두 하나님께 기도로 드려진 노래였다. 그래서 그 날의 설교 내용상, 인간의 그 어떤 말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심령을 더 간절하게 표현해 주는 곡이 있을 때에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그 때는 성가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곧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만인제사장의 회복, 성경적인 예배로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 갈 때, 예배는 늘 새로울 수 있었다. 근래에 유행하는 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열린 예배가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만인제사장의 회복을 위한 열린 예배는 주님의 교회가 그 효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