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사고와 시야의 회복
이단이나 사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집단생활이요, 둘째는 교주에 대한 집중이다. 방안에 교주의 사진을 걸어 두게 한다든가 혹은 교주의 사진을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니게 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사진 속의 교주와 눈을 맞추게 하는 것이다. 이단이나 사교가 이처럼 집단생활과 교주에 대한 집중을 의무화하는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다. 사람들의 사고와 시야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바꾸어 말해 교주나 교주의 말 이외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바른 판단의 능력을 박탈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교주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교주의 사병이 된다. 실제로 사교집단에 의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멀쩡한 사람들이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사교집단과 교주의 노리개로 농락 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사고와 시야를 철저하게 차단 당한 결과이다. 일단 사고와 시야가 차단 당하고 나면 교주의 모든 말은 지고의 선이 되고 만다. 이단과 사교를 경계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만약 고의든 아니든 상관없이 교인들의 사고와 시야를 계속 차단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실은 이단이나 사교 에지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닌 유한한 존재인 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이시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갈 수 있도록, 교회는 늘 사람들의 사고와 시야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코끼리를 가리켜 기둥이라는 부르는 어리석음에서 절대로 탈피할 수가 없다. 그 어리석음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는 한, 교회는 이단이나 사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2월 17일 방주에 들어갔다가(창 7:11), 그 다음 해 2월 27일 방주에서 나왔다(창 8:14). 노아는 만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대로 건조된 그 방주에는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없었다. 창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는데, 그 위치는 천장에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노아는 1년 열흘 동안 천장의 창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는 이단이나 사교와 동일해 보인다. 노아 역시 가족들과 집단생활 해야 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시선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가 오히려 사교집단과 정반대 인 것은, 사교 교주에게는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시야가 차단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은 시야의 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집중할수록 하나님의 시선으로 시야가 차단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은 시야의 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집중할수록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나와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나와 생각이 상이한 사람도 하나님의 도구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 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와 시야를 바르게 회복한 노아를, 하나님께서 인류의 중시 조로 삼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 및 시야의 회복을 꾀하기 위하여 총론적으로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면서, 각론적으로는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로 시인 구상 선생님을 보시고 카톨릭 신자가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경건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들어보았다. 카톨릭 신학대학 오경환 신부님으로부터는 '카톨릭에서 본 개신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승혜 수녀님에게서는 '수녀가 본 영성의 세계'란 제목의 가르침을 받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님의 '교회 안에서 본 교회의 문제', 서강 대학 비교종교학과 길희성 교수님의 '비교종교학자가 본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강연회도 가졌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향린 교회 홍근수 목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복음관에 대한 설교도 들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 교수님을 초청하여, 성경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 그가 왜 교회의 교인이 되기는 거부하는지 이유를 들어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동국대학교 불교과 윤호진 스님으로부터, 프랑스 유학 당시 수년 동안이나 수도원에서 기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장로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문제'와 장로가 바라는 '미래의 교회상'에 대하여, 이진우 장로님과 김도묵 장로님의 소신을 들어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 면서, 편협하고 획일적이기만 하던 우리의 사고와 시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회복되어 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를 절실히 깨달으면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경건하게 세워 가야 하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사랑하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자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와 다른 교리와 신조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누구보다 득을 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것 또한 주님의 은총이었다. 만약 그런 과정을 거쳐 나의 시야와 사고가 회복되는 은혜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주님의 교회 교인들의 사고와 시야를 차단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주님의 교회가 시작되던 10년 전,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이글은 회복의 목회 40∼49쪽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