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34)

새벽지기1 2017. 1. 12. 08:04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특히 그것이 억압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된다면,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참된 이원론이 있다고 믿는 기독교 진리와 양립될 수 없다(레 26장, 신28장).
사도 바울이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롬 8장 4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롬 8장 7절).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은 이 말씀을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보아 물질적인 것을 멸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의심케 하는 위험한 이원론이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육신’과 “영”은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피조물로서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양식을 뜻한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반해,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권면하는 것은 그것이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 순종이 억압을 조장하는데 악용되었다. 가령, 19세기의 노예제도나 20세기의 인종 격리 정책이 신학적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신약은 언제나 순복을 자유롭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엡 5장 21절).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강압에 의한 복종은 억압에 이르고 죄가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참된 자유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권력을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여겨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종의 참된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모든 형태의 복종을 거절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에 주권자인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는 것과 떨어져 볼 수 없다. 이 고백을 부인하는 것은 한 인간이 되는 성경적 의미를 뒤엎는 것이다.


성경적 신앙은 창조자 하나님과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 순종의 형태가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에 계시되어 있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장 34절). 따라서 인간의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면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포괄하는 것이 적어도 남성의 성행위 분야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인간성을 추구하는데 절실히 필요하다.


남성의 자기인식은 특히 죄 때문에 뒤틀려진 문화 환경에서 흔히 음경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음경은 남성의 힘과 정체성의 상징이다. 이 ‘음경 의식’은 전쟁과 강탈과 관련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음경 상징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문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일반적으로 다산 의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주상’을 깨뜨려야 했고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주상을 세우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출 34장 13절, 신 12장 3절, 16장 21-22절). 이렇게 성경은 음경 비유를 사용하지만 반음경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써 다산에 기초한 신앙을 배격하고 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