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손양원목사

부활하신 주님의 五대 특은(特恩) (요 20: 19~20)

새벽지기1 2016. 10. 20. 06:17



이 제자들이 모인 방은 성만찬을 베푸시던 곳이 아닐까 싶다. 가롯 유다는 물론 없었고 또 도마 까지도 없었으니 제자들은 열명이었을 것이다. 제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문을 닫고 모인 까닭은 자기들까지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영화(靈化)된 주님은 자유 자재의 몸이심으로 문 닫은 곳이라도 능히 들어오실수 있었다.

주님의 일생을 3기로 나눌수 있다. 제1기는 30년간 가정생활의 시기이니 자신 준비의 시대로 사적 생활의 시기인 것이다. 이는 우리 기독자에게 있어서 지상(地上)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제2기는 삼년간 전도 생활의 시기이니 다른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대이다.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는 공적(公的)생활의 시기인 것이다. 이는 하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되 특히 속죄구령(贖罪救靈)사업을 가르치는 시기인 것이다. 제3기는 40일간의 부활하신 영화(靈化)생활의 시기이니 제자들에게 참 복을 받게하는 시기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천국 생활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30년 생활보다는 3년 생활이 더 귀하고 또 3년생활보다는 40일 생활이 더욱 중한 것인 것을 알수가 있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 말하고저하는 이 부활 직후에 주신 5대 특은은 기독자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니 잘 받아야 한다. 부활후 단 40일간에 11차나 나타나신 기적과 말씀하신 교훈과 행하신 일들은 놀랍고 크고 좋으나 이번에는 우선 부활 후에 5대 선물만 말하고저 한다.

1. 평강을 주셨다(19하~21상)
'너희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유대인들의 인사법이다. 즉 육적 인간들의 예의였으나 사실은 방에 있는 그들이 괴물(怪物)인줄 알고 놀랄까 보아서 하신 말씀이다. 겁을 내여 문을 닫고 있으니 영화된 몸으로 나타나시면 그들은 물론 더욱 놀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어서 그들을 우선 안심 시키셨다. 31절에 보면 또 거기에도 재차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었다 이 평강은 영적이요 위대한 평강인 동시에 큰 진리가 감추인 평강인 것이다. 이 평강은 주님께서 세상에 나실 때에 천사들이 예언하던 평강인 것이다. 즉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눅 2:14)'하신 말씀이 그대로 응해지는 말씀이고 또한 주님께서 교훈하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하신 말씀대로 실제로 주시는 것이요 장래 무궁 세계의 평강이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하신 미래 영원한 평안의 시작의 말씀인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인생은 누구나 진정한 참 평안한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첫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가 같은 사람도 노병사(老病死)인 삼대고(大苦)를 면해 보려고 했으며 또 다른 많은 이들도 애를 썼으나 실제 참 평안을 누리고 산 자는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고(我而苦) 아이구(我而救)는 인간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 일시적 외부적 물질적으로 해서 기쁘고 즐거워 웃는 자 있었으나 참 진정한 평안을 누린 자는 없다. 주님은 첫 아담 이후 첫 소리로 첫 복이 세상에 임하게 하졌으니 먼저 우리들로 시작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었다.
여러분 마음 속에는 주께서 주신 참 진정한 평안이 있는가? 주님이 내심에 가지시었던 그 평안이 여러분에게도 체험 되었는가? 천사가 예고한 평안을 또한 장내 무궁 세계에서 누릴 복을 조금이라도 맛보았는가?그렇게 못한다면 이 평안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무엇이 이 평안을 막는가? 혹은 받았으되 몰이해(沒理解)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는다면 받았던것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바로 명령이시다. 대 명령이시다. 모든 염려를 헤치고 깨뜨리고 맡기고 막 받게 되는것이다. 무조건으로 그냥 무엇이든지 다 맡겨 버리고 그저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도 중간 길 새 길이 생겨 마치 진퇴양난중에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없던 길이 생겨서 살길 평강의 길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근심이 되거나 어렵거나 억울하거나 답답하여 절망이거나 죄이거나 무엇이던지를 불구하고 맡겨놓고 볼 일이다. 기도만 해 놓은 즉 만사 해결이다. 오늘까지의 내 신앙 생활이 그리하였다. 신자의 근심 걱정은 그것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해 본즉 진리의 해답이 나오게 되니 무조건으로 평강만 받으라는 대 명령인 것이다. 예수가 주시는데 누가 안받겠으며 누가 비난하며 누가 막겠는가? 너희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다. 그런고로 마음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염려를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아무리 큰 죄나 난경이라도 어렵다고 뒤로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 가는 자는 다 망하고 어쨌던 전진하면 다 살고 지혜나 권능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2. 성령을 주셨다(행 2: I~4,요 20: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이는 참으로 복중의 대복이다. 예수님을 뵙기만해도 복되고 듣기만해도 복된데 사귀이는 영광은 무한히 커서 비할데가 없는데 하물며 삼위중 한위되시는 즉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을 주어 받게 되는 그 복 그 영광이야 무엇에 비하랴! 즉 첫 아담의 자손인 죄인이 두째 아담 예수의 인격으로 중생케 되니 이 어째 복되지 않으랴.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영적 인간이 되게하시는 이 원리는 꼭 주와같이 되게 하심이다.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까지 되게 하신 것이요


중보직 삼직(三膱)의 인격을 갖추어 위대한 인간이 되게 하신 것이 곳 성령을 받게하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더니 이제 제자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어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생기는 즉 숨이요 즉 생명인데 이 생명은 즉 성령이신 것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심같이 성령은 성자로 부터 보내게 된것이다. '성령을 받으라'성령을 주실 보증같이 보인다. 그것은 사실 오순절에 임한 까닭이다. 그러니 성령의 역활은 오순절 전부터 활동하고 계셨다. 마치 십자가의 고를 것세마네 혈한고(血汗苦)에서 맛보시었고 주님의 부활 전 부활은 변화산상에서 보여 주시었고 오순절 전 성령은 부활 직후의 기운을 불어 성령을 주신데서 부터 볼 수 있는 것이다.


'받으라' '생기를 부으셨다'는 대기(大氣) 대명(大命) 대능(大能)이시다. 이것으로서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심령위에도 내리시는 것이다. 누가 감히 거역하랴! 받고 안받는 문제보다는 주시는 이의 대능이신 것이다.‘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심에 어찌 나사로가 못 나오겠는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썩었다는 말이 무슨 관계냐, 무덤의 강한 문은 무엇으로 얽어 놓으랴, 누이 마르다의 불신앙이 무슨 관계냐, '나오라'는 대 명에는 막을자가 없는 것이다. 대명에는 '빛이 있으라'하니 캄캄한 흑암도 광명해졌다. '궁창아 나오너라' '물이여 갈라져라' '해야 달아 별아 초목아 생물아' 주님의 이 이적 기사의 대능은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으리요. 반문 할 수 있으리요. '평강이 있을 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이 말을 믿는 자면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 구주로 믿는 자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로 믿는 자면 다 받는다.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를 믿는 자는 다 받는다.

3. 사죄 특권을 주셨다(요 20:23,마 18:18)
기독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이다. 십자가라 할때에는 먼저 죄란 것이 관계가 된다. 그런데 부활을 말 할 때에는 웬일인지 죄악이니 하는 것은 생각조차 없어지고, 새 기력과 신세계의 소식을 가저 오는 듯한 심령 기분을 가지게 되고 만다. 사죄 특권을 받은 자는 누구냐 하면 십자가의 보혈에 서 죄 씻음을 받은 자다. 회개한 그 자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우리는 참으로 사죄의 특권을 받게 됨을 확신하는가, 주의 십자가의 대속을 확신 하는가. 주님의 부활에 확신이 있는가. 사죄의 평안을 얻었는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사죄의 특은(特恩)은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은 대권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어떤 교파의 사람은 이 특권을 남용(濫用)해서 교황 정치에 기울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월권해서 타인의 행동을 주장하고자 하는 범죄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참으로 이러한 대권을 받은 심령 충만한 자를 보면 오히려 겸비해지고 온유하여진다.
다른 사람을 형님으로 높이고 더럽고 무서운 죄악만 다스려서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죄에서 풀어놓아 위대한 특별한 은혜를 받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인의 죄를 사할 수 있겠는가?
(1) 기도로써‥‥‥제사장 직으로 대신 기도하면서 대신 기도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친구를 믿게 하려고 기도 했으나 장례날에 가서 믿게 한 이야기)
(2)전도하여서‥‥‥불신자와 악행자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여야 할 것이다.
(3) 받은 바 복음을 가지고‥‥‥바로 성경 말씀을 잘 듣게하여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4)좋은 교훈으로써‥‥‥심방이나 권면 또는 설교를 통하여 할 것이다.
(5) 실제로 신인간(神人間)불화를 부활 시킴으로써‥‥‥형제중 불목하는자 있으면 지혜롭게 상의하여 화목함으로써 할 것이다.
이와같이 이러한 특권을 받은 우리들은 이 좋은 특권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조금만 권세나 지위가 있으면 그것은 악용하기 쉬우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사죄 특권은 더욱 그러한 것이다.

4. 사도의 성직을 주셨다(요 20:21상, 마 28:16~20)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십자가로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시고, 부활하시어 사죄의 평안을 주시고, 새생명으로 중생케 하시는 심령을 주시고, 사죄케하시는 특권까지 주실뿐 아니라, 주님이 가시고나서 당신 대신으로 행해야할 대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 육신으로 계셔서 역사하실 때는 12제자를 택하시여 3년간 전도에 동역(同役)케 하시더니 이제 부활 영화의 주로는 승천후 천당에서 성신으로서 남종과 여종을 통하여 사도의 성직을 수행케 하신다. 대 사도의 성직을 주신 임명하는 이 말씀에는 두가지 큰 뜻이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에서 "같이"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과 일체요 동일하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령 요한복음 17:16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니다' 또 요한복음 17:11, 21, 22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이 되어 운운'요한복음 15:10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회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3:34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렇게 찾아 볼 때에 주와 하나님이 일체시요 또한 우리도 주와 일체인 것이 분명한다.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에서 "보낸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먼저 있는 보내신다는 동사의 뜻은 파견된자가 파견하는 자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을 가르킨다.
그러나 두째번 나오는 "보낸다"는 말의 뜻은 보통 사명을 주어서 보낸다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항상 주님과 함께 하신 것같이 주님은 항상 제자와 떠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고 보내신다는 뜻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혼자 있는 것같아도 그 뒤에 보호자가 늘 감시하고 배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할른지! 주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신을 통하여 보호하심 같이 제자들도 보호 하시면서 보낸 것이 자기 혼자 살고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대로 우리 기독자는 누구나 다 각각 분량대로 살어가는 개인 생활과 동시에 우리 주님의 남은 사업에 전권대사의 중책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않아야 한다.

5. 대속과 부활의 확신을 주셨다(요 20:20)
요한복음 20:20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성경의 순서대로는 이 말씀이 먼저였으나 내가 순서를 바꾼 것은 앞에 말한 네가지 복음의 사실을 믿느냐가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시여 우리를 중생시키는 첫 열매가 되어 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토대는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이러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일이니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인즉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이 믿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지혜있는 이에게는 과학적 증명이나 합리적 이론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여 주시는데야, 만지게 하여 주시는데야 어찌 못믿겠는가? 과학적인 머리를 가진 도마도 아니 믿을 수 없었고, 박해하던 대학자 바울도 부정 할 수 없었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어거스틴, 오리겐, 칼빈, 같은 대 학자들도 이런 사실 앞에서는 아니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우리 같은 무식하고 미련하고 빈약한 자에게도 믿도록 하여 주신다. 꼭 하나님이 보여주어야 보고 믿게 되는 것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20절에 보니 닫은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가 시어서 보이시니 그들은 보게 되고 기대했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항상 무엇이던지 하나님 편에서 먼저 하시고 인간편에서는 믿기만 하면 된다.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었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보게하소서" "알게 하소서" "믿게하여 주옵소서""사하여 주옵소서"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정의감 간구심, 순종심,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천당에서 먼저 내려오셨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가셨다. 네가 낫고져 하느냐 물으셨고, 다시 죄를 범치말라 하시었고, 네 믿음이 너를 성하게 하였다 하신 것이다. 이때에도 그들이 문을 닫고 있는 그 안에 일부러 들어가시어서 보이시니까 불신으로 절망 속에 있던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동시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보라 도마와 같이 믿지 못하겠다고 하던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까지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시었다. 가롯 유다는 본래의 갈대로 간 것 뿐이고 베드로는 본선(本線)으로 도로 올려 세우신 것 뿐이다. 그러나 29절에 의하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보는 데는 영과 육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에 영안이 육안보다 나은 것이다. 오관(五管)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심령으로 파악함이 신앙이다. 이 신앙의 눈이란 인간 편에서 보라고 눈을 뜨는 것과 같아 "주는 곧 광명의 빛이시니 빛이 임하시여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보고 믿기만 하면 된다. " 우리들에게 이처럼 확신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은 참으로 감사 할 뿐이다. 사도들이 거의 모두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런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께서는 이러한 다섯가지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많은 것이 있겠으나 본문에서는 이 다섯가지를 찾아 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신 것은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도 이런 은혜 받도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