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온전한기독인

[3-2] 인간에 대한 좀 더 나은 교리

새벽지기1 2016. 8. 31. 07:30


2. 인간에 대한 좀 더 나은 교리


박애 정신과 인류애에 바탕을 둔 일 모두가 인간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따라 좌우된다. 모든 인간의 가치 및 존엄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들을 섬기고자 한다. 그렇다면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인간의 복지에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이 인간의 복지에 헌신한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인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 인간의 문제, 인간의 복지에 진력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보다 인간에 대해 더 인도적이고 더 동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간의 복지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하기를 상당히 어려워한다.


여러분 가운데 "인본주의의 구조"(The Humanist Frame)라 일컫는 거창한 논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논문 특히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가 기고한 글에 따르면, 인류에 봉사하는 유일한 이유는, 앞으로 무한히 긴 시대에 걸쳐 진화되면서 실현될 인간의 잠재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오늘날 인간을 섬길 가치가 있는 까닭은 앞으로 수백만 년 후에 인간이 진화해 있을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헉슬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오늘날 인간을 섬기는 기초로서는 형편없이 부적합하다는 데 동의한다. 진화가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라면 우리가 왜 노인들이나 저능아들, 만성 병자들 또는 기아들을 돌보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 때문에 진화의 과정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들을 잘 길들여진 개처럼 죽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동정적인 봉사가 아니라, 강제적인 단종(斷種)과 강제적인 안락사가 인본주의적 전제로부터 나을 수 있는 논리적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머리보다 낫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박애 정신이 그들의 철학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헉슬리와는 다른 이유로, 즉 인간이 미래에 진화될 모습 때문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이미 되어 진 모습 때문에 인간을 섬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다. 우리는 사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며, 미적 즐거움을 누리고, 사랑하며,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하며, 영적 경험을 누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등 동물들과 완전히 분리된다. 물론 인간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적 형상을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다. 성경은 인간이 그 형상은 왜곡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박애 정신을 고무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영원한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영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또 먹고 입히고 치유하는 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복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적 존재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 내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적으로 올바른 정의이다.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적 존재이자 영적 존재로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고로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의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그들의 존엄성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전파하러 도처로 갔다. 왜냐하면 복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훗날 그들은 학교와 병원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세웠다. 노예 매매를 폐지하고 노예를 해방시켰다. 공장 근로자들과 죄수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시켰다. 어린아이들이 서유럽에서 상업적으로 착취되지 못하도록, 동양의 사원에서 의식의 일환으로 벌어졌던 매음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보호했다. 오늘날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동정은 물론 현대적 의술을 제공하는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소경, 고아 그리고 노인을 돌본다. 마약 중독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마약을 끊는 고통스러운 기간에 그들 곁에 머문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종 차별과도 싸우며, 또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압제에도 저항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 빈민굴의 상황에 참여하여 도시 빈민들을 돌보며, 많은 인간에게 지워진 비인간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 빼앗긴 자들, 굶주린 자들 그리고 혜택 받지 못한 자들과 연대하여 이를 행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곧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교리 때문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그들은 섬김을 받아야 하며 착취당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양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이 무엇이든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헌신할 것이며, 또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섬기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코끼리를 닮은 사람](The elephnt Man)이라는 책이 영화화 된 이후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프레드릭 트레브스 경(Sir Frederich Treves)은 빅토리아 시대 말엽 런던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 1885년 그는 병원 맞은편에 자리한 빈 야채 상점에서 훗날 코끼리 사람(the elephant‐man)이라 알려진 한 생물체를 발견했다. 트레브스는 그를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구역질 나는 기인' 이라고 묘사했다. 이마와 윗턱에서 불쑥 튀어나온 배와 더불어, 엄청나게 일그러진 모양의 머리로 인해 그의 외모는 코끼리를 연상시켰다. 버섯 또는 갈색의 양배추와 같이 푸석푸석하고 악취 나는 피부가 그의 등, 가슴,머리 뒤편 그리고 오른팔에 자루처럼 늘어져 있었다. 다리는 불구였고 발에는 구근이 있었으며, 고관절염에 걸려 있었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며 침을 튀기며 말했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왼팔과 손은 여자처럼 섬세하고 맵시가 있었다. 이러한 그의 고통을 더해 주듯 그는 동물같이 취급받았다. 그는 이 시장 저 시장, 이 서커스 저 서커스로 팔려 다니며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게 2펜스씩에 전시되었다. 프레드릭 트레브스 경은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그를 문둥병자인 양 피했으며 야생 동물같이 재웠다. 또 그가 세상을 보는 유일한 길은 서커스 단장의 마차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서였다. "그는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기어들곤 했다.


그러나 트레브스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존 메릭(John Merrich)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21세였다. 그는 높은 지능을 가졌으며, 예리한 감성과 낭만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불쌍한 사람이 서커스 단장에게 버림받았을 때, 트레브스는 그에게 런던 병원 뒷켠의 방을 마련해 주었고 그를 돌보았다. 그는 그 곳에서 3년 6개월 정도 살다가 잠자는 중에 죽었다.

처음으로 한 여성이 존 메릭을 방문하여 그에게 웃음을 띄우면서 인사하고 악수하며 인간적인 존엄성을 갖고 대했을 때, 그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며 울어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웨일즈의 공주였던 알렉산드라 여왕(Queen Alexandra)을 포함한 많은 저명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점차 사냥감에서 사람으로 변화됐다고 트레브스는 말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인 것이다. 존 메릭으로 하여금 그 형편없이 일그러진 머리를 쳐들게 해서 어느 정도 자존감을 얻게 만든 것은, 바로 프레드릭 트레브스의 인간 생명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에 대한 더 나은 교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코끼리와 같은 사람을 돌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이 교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