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39 (엡4:4-6) (2)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7. 27. 12:36

 

성경: 엡4:4-6절(2)

 

4. 한 소망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강조한 세 번째 면인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몸은 하나이요 성령은 하나이다.”라는 말에서 “몸은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몸을 살아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몸의 생명은 “한 성령”이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그 이치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필연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성령께서 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한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가 최후의 목표가 아니며, 교회는 몸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류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백성으로 불러내셔서 완전하게 하시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난 회복된 영광스러운 세계에서 살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모든 것은 그 최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최종적 임재와 그의 영원한 왕국을 건설 하는 일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의 그 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큰 날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 몸에 결합시키는 일, 즉 우리를 소생시키는 일 외에 개별적으로 또 다른 특별한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신 후에, 성령은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에게 보증해 주십니다.

또한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그 모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앞으로 다가올 큰 기업의 상속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거의 신분과 상관없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는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며, 현재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도 안 되며, 다른 것들을 바라보거나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하나이며 언제나 동일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입니다.

 

 

5. 한 분 주님


이제 우리는 “주도 하나이요” 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말씀에는 주님의 위격에는 유일성이 있다는 것으로,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와 같으신 분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절대적 유일성의 모든 영광 가운데서 오직 혼자이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의 현상”이며, “충만한 광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인성과 신성의 두 본질을 동시에 가지신 오직 한 분, 곧 “한분 주님”으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로운 진리로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곧 이 한분 주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주께서 기독교를 만드시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로서 주님이 전부입니다. 기독교는 놀랍고도 유일한 성육신과 주께서 행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꼭 유의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분리하여 나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유일하며, 그리스도의 죽음도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든지 다른 어떠한 것도 첨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무 편협하다고 말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고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으며, 그와 비슷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적극적으로 편협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주께서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를 소유 할 수도 없습니다.

한분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그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내가 주인이고 너희는 종일뿐이다. 그런데 내가 주인으로서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한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섬기는 자로서, 또 형제를 섬기는 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6. 믿음도 하나


사도의 두 번째 표현인 “한 믿음”은 “한 주”와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특별하게 분류한 어구 속에 같이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믿음”이 가리키는 뜻은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의 위대한 말씀으로서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유일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이 외에 다른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서 “한 믿음”에서 벗어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안에서 안식하며,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신 성령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7. 한 세례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첫 번째 설명의 말씀 중 세 번째 단어인 “한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는 이 요점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이 우연하게 이런 식으로 단어의 배열을 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부연해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주도 하나이요”에서는 주님의 위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믿음도 하나이요”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방법인 칭의와 관련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부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촉진시킬 수 있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세례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로 인해서 자주 토론과 분열과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세례가 중생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세례의 형식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례의식에 관한 말씀이라고만 해석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배격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믿는 자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에 대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질문하였을 때, 베드로의 대답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여진 일이었습니다.

 

 

뒤에 가보면 빌립보 간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믿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더라.”

세례와 성찬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할 일이며, 우리가 지키는 성례는 그 두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두 가지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성례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은혜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세례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의미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유아 세례를 받았거나 성인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거나, 침례를 받았거나, 물 뿌림의 세례를 받았거나 간에 이 통일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례 행위의 자체가 무엇을 이룬다든지, 세례를 받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어떤 의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통일의 요소가 됩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세례는 한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죄를 용서받고, 죄 씻음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왕국, 곧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속해 있으며 전혀 새로운 영향권 하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하여 있던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를 벌하시고, 그의 의를 전가시키셔서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칭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속하게 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영역에 대하여 죄의 권세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각기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실체 속에 스며들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가 말한 “한 세례”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는 의식이나 어떤 마술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이름과 한 주님이 있을 뿐이며, 오직 한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늘에 오르신 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결합되어 있고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옛 사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8. 한 하나님


이제 사도는 최고 절정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는 성령과 성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성부 하나님까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으로서 당연히 성령의 사역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자에게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주된 목적과 소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이 진리를 경험적 순서에 입각하여 배열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진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분 하나님만 존재하실 뿐입니다. 그러나 신성 안에는 삼위가 있지만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한 신성 안에 삼위가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통일된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고”,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모든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보다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옵니다. 즉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짐승들과 장로들과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경배하며 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립니다. 하늘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하늘나라이며 거기에는 불화와 분열이 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절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은 행복하고 기쁘고 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땅 위에서도 우리가 이 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모든 차별과 분열은 즉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기타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되며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경이와 사랑과 찬양에 몰두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함께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통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유는 “한 몸”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의 아버지이시며 믿는 이들만의 아버지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로서 일반적 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부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인간의 우주적 형제 성을 믿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아버지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은 이미 배웠던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질 성전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성전에 거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천사들도 이것을 알기를 열망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