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35 (엡3:18-19) (2)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7. 4. 09:00


성경: 엡3:18-19절(2)

 

5.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


우리에게 이제 남아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에 도달 할 수 있을는지에 관한 건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그 영광에 이를 때 우리가 놀라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될 것에 관하여 놀랄 뿐 아니라 우리가 이곳 지상에 있는 동안 무지했다는 것에 관하여 더욱 놀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에게 처했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체험할 수 있는 놀랍고도 축복된 경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도록 얼마나 방치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점에 대하여 권고하기를 “그의 강림하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으니,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에게 상급이 주어질 텐데, 영원하도록 보존될 그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을 자랑하고, 사랑하며, 누구든지 그 자녀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모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우리를 통하여 또한 우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기계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동판매기와 같은 기계는 영적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도들의 경험이나 체험, 혹은 어떤 깨달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텐데,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하여 반복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기계적인 견해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가 축복은 받은 경로와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와 똑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어쩌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관계를 다룰 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적인 교제의 영역에서는 기계적인 방법이 가치가 없고 오히려 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이나 그와 같은 경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어떤 것,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때와 장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축복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면 “저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에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와 같은 사고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축복을 명령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와 은혜로서 축복을 분배하여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어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단의 시험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온갖 힘을 다하여 어린아이로 머물러 그리스도와 가장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단 속에서 만족하도록 하는 데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때 마귀는 그 일을 굉장히 염려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좋은 칭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마귀의 나라는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를 억누르고 자기 하수인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맹렬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마귀를 대항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에베소서 마지막 장에서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기를 구한다면 마귀는 그의 부하를 풀어 우리를 대적할 것이며, 이제까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마귀의 음흉한 궤계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전하는 즐거움의 체험과 기도회에서 찾아오는 체험, 찬송을 부르면서 느끼는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알게 되는 체험,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체험들이 위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깨달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를 실망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이 다르듯, 청년시절의 문제들은 중년시절의 문제와 다르며, 중년시절의 문제들은 노년시절의 문제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다른 영역에 있게 되며 다른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초기 단계에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일을 그 다음 단계에서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아주 똑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집회나, 책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의존하여 어떤 좋은 감정이나 작은 행복감을 체험하는 것에 만족하여, 주님 자신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6. 손님맞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영역에서 특별한 영역으로 성큼 올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 없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특수한 것에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디매오가 행한 것처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시급하고도 명백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며, 어떤 점에서 성경의 주요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나 주님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읽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할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읽는다면 아마 조금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에 일정량을 읽었기 때문에 자기만족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능이나 소질들을 사용하여 읽어야 하되, 성령의 조명과 감동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읽기 전에 자신에게 훈계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경 읽기는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수한 말씀을 통해서 갑작스레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책에서 나오셔서 친히 성경을 읽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 읽기에 있어서는 사색과 명상, “마음의 준비”,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마음과 갈망하는 기대, 그리고 어느 곳에서라도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원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는 어떤 면에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자유로움을 좀더 풍부하게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전에 무엇을 아뢸 것인가 미리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무척 중요한데, 이것을 회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생한 응답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새롭고 더 받고 싶은 축복과 은혜를 원한다면 간구하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일도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고 몹시 싫어하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그리고 그것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에는 전심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고 하셨고 잠언 8:17에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시편에서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원리로 주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그것을 찾고,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력을 읽느라, 기도하느라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것을 행하기에 너무 바빠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무디고 반응이 느리며 분주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매우 조용하고 고요하게 오십니다. 성령은 모든 새 중에 가장 온화한 비둘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거룩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항상 사랑의 충만하심만을 표현하시는 것은 아니며, 오직 사랑에 대한 세미한 암시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장 세미한 표현에 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한 가지 판에 박힌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 주십니다. “사소한 날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지극히 작은 그림자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온다 하더라도 즉시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충동이나 혹은 기도의 요청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미한 사랑의 감동이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즉시 반응을 나타내고 행동하며 그에게 복종하며, 그분이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즉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은 자주 오실 것이며, 나타내 주심은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드러운 접근 중 하나라도 거절하거나 깨닫지 못해서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 다른 소음이 있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시며, 주님을 밖에 세워 두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항상 준비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갈망하고 대기합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가장 확실하게 찾아오시며 손수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이제 우리는 기도와 간구의 영역에서나 또는 체험의 영역에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질 때에만 완전해집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에서 그 완전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전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인간의 원죄였습니다. 누구에게도 전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 영원성이 있고, 불변성과 편재성이 있으며, 전지성과 전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성함이 있으니,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고후 11:31) 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모든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빛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위엄과 권능에 있어서 영광스러우신 분입니다. 성경은 “영화로우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위엄과 광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과 영광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을 때조차도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들었으며, 단지 하나님의 “등”만을 보도록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영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압도되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작 같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과 위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그분의 필수불가결한 속성이며 모두 다 분명히 전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가될 수 있는 속성은 사람에게 부여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됩니다. 그것은 거룩함이며, 또한 의, 정의, 공의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성은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충만하신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과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에 대하여 충만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앎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주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순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노력으로 강건해져야 하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충만하심으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게 해 달라고 단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에서도 이와 똑같은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러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신다면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충만하심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적인 표현은 참으로 빈약하며, 우리의 지성과 이해는 참으로 좁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바라볼 때에 참으로 진리는 존재한 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는 진실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부가 그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내 안에 질적인 생명으로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8. 충만의 체험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본질적으로 실제적이며, 확고한 실체로서 우리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상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시급한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충만한 것과 능력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활동이 증거합니다. 어떤 점에서 1738년 5월 이전의 존 웨슬리보다 더 바쁘고 더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 졌을 때 그의 전체 봉사가 변화되었고 그는 능력 있는, 그리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이야 말로 가장 실제적인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실제적인 사람은 항상 분주하고 흥분하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부흥입니다. 교회가 능력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부흥될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를 그들의 삶의 앞면에 두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삶의 뒷면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급할 때에나 찾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이나 혹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몹시 아프거나,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되었거나, 어떤 재해가 일어나거나,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의 필요를 충당시킬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예금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활용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지배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외적인 모든 행동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선으로 결말이 날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을 하고 이 새 생명의 원리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순간 새로운 본능과 소망, 새로운 목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것들의 성취를 보기를 갈망하게 되며, 점차적으로 성취되어 만족하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결핍과 공허와 부족의 감정이 없으며,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떠나 지상에 오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대화하고 논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알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