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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2 (엡3:14-16)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6. 14. 08:30


1. 아버지께 기도함


본문의 “이러하므로”라는 표현은 사도가 2장 끝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2장 끝부분과 관련이 연관하여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말씀에서 기독교에 대한 고상한 개념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바가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한, 그들의 위치가 이스라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자기의 거주지를 삼고 있는 주 안에서 거룩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라는 것과, 악한 원수들에 의해 붙들려 있고 속박당하고 있어서 에베소 교인들을 방문하여 설교하는 것이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설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을 지라도 원수 마귀는 바울이 기도 하는 것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수는 그를 감옥에 가둬 놓을 수 있고 문에 빗장을 질러 잠글 수 있으며, 병사들을 시켜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게 할 수 있으며, 창문에 창살을 질러 잠글 수 있고, 그를 에워싸서 육체적으로 가둬 놓을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기도할 수 있었으며, 원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전혀 없습니다.


지극히 어린 성도의 마음이라도 영원한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기도의 영은 여전히 자유로우며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할지라도 우리는 영으로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 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감옥에 갇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유익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혹은 개인의 일들과 사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가 없다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현 세계를 위해,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정말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가 교육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에 의해서 여기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숙고하며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고 주석을 읽으며 교회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교리에 대한 책들을 읽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아도 지나치지 않고, 우리는 교육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지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들보다 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것이 단지 우리의 지성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감정과 의지에 까지 나타나서 전 인격에 영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교훈 그리고 어떠한 것을 한다고 할지라도 기도는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다른 중요한 문제는 사도 바울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않고 신중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기도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매우 신중히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극단적인 형식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든지 서서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엎드려서 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는 성경에서 모두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로 사람의 중심 자세, 즉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는 표현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의 존전에 나가기 위해 취해진 자연스럽고 반사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영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땅”에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라고 말한 것은 10절에서 “이제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려고 하신”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1장 끝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는 분”이시라고 훨씬 더 자세하게 쓰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여러 집단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일반 천사들과 천사장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모든 부권과 국가, 그리고 구역이 결국 하나님의 부권에서 유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바로 그 집단이 이 우주적 부권 아래 모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구속받은 족속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이라고 하는 족속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가족의 이름”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와 계급 또는 집단이나 학교, 즉 그 이름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책임지어진 그 이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 족속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족속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아버지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책임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며,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위에 두신 그 이름을 통하여 우리 것이 된 그 특권과 그 높음과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그 두려운 책임에 우리가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 속사람


14절에서 시작하여 21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말씀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영광스러운 영역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실제로 기도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서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몇몇 기도들은 모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기도가 가장 귀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우리를 곧바로 하늘나라로 인도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용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라고 간구함으로서 우리를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합니다.


그는 개종한 이교도들로 전에 노예였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풍요함과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것을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자신의 어떤 환경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곤경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나 그들을 위하여 환경을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들도 참으로 해 볼만한 것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큰 일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간구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입니다.

그의 기도는 오직 영적인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언제나 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특징은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들추어내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씩, 하나씩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기도와 헌신에 있어서 주된 관심을 가지며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맨 먼저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에 대한 모든 문제,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한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주된 관심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었으며,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축복에 대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육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육체는 쇠하여 지고 영혼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우리는 이 쇠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적인 일을 우선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달라고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육체 안에는 그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법이 있고, 또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과의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속사람은 육체의 모든 재능과 기능과 상반되며 그것들과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곧 영적인 부분입니다. 중생되지 못한 자의 문제는 이 속사람의 결여인데, 그들은 속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오직 겉사람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육체로만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생명 곧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부분이라고 부르는 그 생명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인생은 자신의 깨달음,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감각과 세상의 사물들에 대응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하여 한정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삶이고 그들의 전적인 삶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이성을 가진 동물에 불과하며, 짐승들보다 더욱더 크게 발전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비극은 모든 시련의 은신처인 속사람을 가지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부터 참고 견디었던 전도와 여행과 박해와 곤경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가고, 침침한 눈으로 인해 여전히 괴롭힘을 당했으며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을 때에 “겉사람은 후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퉁이에 앉아서 “이제 종말이 왔구나. 나는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었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며 나의 시대는 가버렸구나! 나는 이제 벽을 향해 돌아서서 종말이라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해져 가는 반면에 속사람은 강건하여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외적인 생명을 가져가 버릴 때 겉사람은 불가피하게 죽어가지만 속사람은 하늘과 영광으로부터 오는 힘을 받게 됩니다. 그는 속사람에로 퇴각하여 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참으로 가엾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주위 환경에 의지하고 그것들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 태어나게 되고,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새사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므로 인생에 새로운 삶의 질서를 시작하게 되어 우리는 새로운 영역,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신의 생명의 씨앗이 속에 심어진 결과로서 그 생명은 성장되고 발전되어지며 때때로 고난과 시련이 그 생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성장하게 하려고 자극합니다.

 

 

3. 능력으로 강건해짐

이제 바울 사도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1장과 2장에서와 같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여전히 계속해서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 있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살피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게 했습니다.

용서와 구원의 체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멈추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자신의 안전과 무사만을 마음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자신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에 쏟아야만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될 소망이 있는가를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장하지 못하여 50년 후에 본다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어떠한 차이도 없이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크고 영광스러운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들 중의 하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모두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처음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하고 무지하며 주위에 있는 많은 세상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덤벼들기 쉬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항하도록 면역되어 있지 않아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자라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원수 마귀, 곧 형제를 참소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음흉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그를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지성이 강건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늘 마음속으로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또한 지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성도 강건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상상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망하거나 자칫하면 불길한 예감에 빠지기 쉬우며, 만사가 잘 되어 갈 때에 조차도, 마음속으로 “지금은 모든 게 좋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라고 생각하고 이내 풀이 죽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살펴보고 분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연약한 것을 알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렸던 그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면 약해져서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성으로, 혹은 감성으로, 혹은 의지로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해왔는지, 우리가 방임한다면 우리를 위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강건해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많이 실패했을지라도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실 수 있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힘이 있는데, 그분은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바라고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내주하실 것입니다.